산상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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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태복음 7장 1절).

자기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노력할 때,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죄에 대한 방벽으로 인간적인 부당한 요구 조건들을 쌓아 올리게 된다.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규칙들과 규정들을 만들고 거기에 억지로 따르려고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자기에게로 돌이키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서 사라짐과 아울러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도 소멸된다. 많은 부당한 요구 조건을 가진, 인간이 고안한 제도는 그 주창자로 하여금 상술한 인간의 표준에 미달하는 모든 사람을 비판하게 한다. 이기적이며 편협한 비판의 분위기는 고상하고 관대한 마음을 억누르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중심의 판단과 마음이 좁은 정탐꾼이 되게 한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부류에 속하였다. 그들은 스스로의 약점을 생각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특권에 대해 감사하며 예배에 나와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영적 교만으로 가득 찬 채 나왔으며, 생각하는 것이 그저 “내 자신, 내 기분, 내 지식, 내 방법”뿐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취한 것들을 기준 삼아 다른 사람들을 비판했다. 그들은 화려한 관복을 입고, 비판하고 정죄하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았다.

백성들도 대부분 이와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양심의 영역에까지 끼어들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문제를 놓고 서로 심판하였다. 124 예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정신과 행동을 두고 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그대의 의견, 의무에 대한 그대의 견해, 성경에 대한 그대의 해석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표준으로 삼지 말고, 그들이 그대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속으로 그들을 정죄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며, 그들의 동기에 관해 추측하지 말고, 그들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린도전서 4장 5절). 우리는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스스로 결점이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심판할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 유한한 사람들은 오로지 밖으로 드러난 것을 통해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행동의 숨은 동기를 아시고, 부드럽고 자비롭게 대하시는 분만이 각 사람의 사정을 결정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로마서 2장 1절).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 죄가 있음을 공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똑같은 짓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함으로써,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판결이 지당하다고 언명하신다. 그분께서는 자신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판결을 받아들이신다.

“투박한 발은 여전히 수렁을 헤매며 끝없이 꽃을 밟으며 가지만, 손은 거치나 온정을 머금고 친구의 가슴을 파고들어 심금을 울린다.”

125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마태복음 7장 3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는 충고라 할지라도,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의 죄의 과중함은 다 나타내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타인의 결점을 잘 찾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다. 품성이나 생활에서 결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때, 그는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몹시 안달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와같이 비 그리스도적인 행동을 통해 꼴 지워지는 품성의 특성은 비판의 대상이 된 결점과 비교할 때 마치 티에 대한 들보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하는 회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를 통해 구주의 사랑에서 나오는, 마음을 여는 감화를 끼치지 못한다. 이들은 복음의 따뜻하고 친절한 정신을 잘못 나타내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귀한 영혼들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 구주께서 사용하시는 비유에 의하면 비판적인 정신에 빠져 있는 사람은 그가 비난하는 사람보다 더욱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동일한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거기에 자만과 비평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만이 품성의 유일한 표준이시다. 그러므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표준으로 삼는 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위치에 놓게 된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요한복음 5장 22절)셨으므로, 사람들의 동기를 비판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의 특권을 다시 찬탈하는 것이다. 126 이처럼 스스로 판관과 비평가의 위치에 서는 자들은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는 적그리스도 편에 자신을 두고 있다.

가장 불행한 결과로 이끌어 가는 죄는 바리새 주의의 특성인, 냉랭하고 비판적이고 용서를 모르는 정신을 가지는 것이다. 신앙 경험에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도 거기에 계시지 않으신다. 즉 그분의 임재의 빛이 거기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부지런히 활동하고 그리스도와 무관한 열성을 아무리 낸다 해도, 이 부족을 메울 수는 없다. 타인의 결함을 찾아내는 데 남다른 지각과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에 빠져 있는 각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신다. 죄를 지어 켕기는 사람이 누구보다 먼저 죄를 알아챈다. 이런 사람은 남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을 감추거나 변명하려고 애쓴다. 사람이 악을 알게 된 것은 죄로 말미암아서였다. 최초의 부부는 죄를 범하자마자 서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그 본성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이렇게밖에 될 수 없다.

사람들은 이 비난하는 정신을 가지게 되면 형제의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만일, 비교적 온건한 방법으로 그 형제에게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시킬 수 없게 되면, 그들은 강제적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들의 힘이 미치는 한 사람들을 강요하여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게 할 것이다. 127 이것은 그리스도 당시에 유대인들이 한 일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상실했을 때 언제나 해 온 것이다. 교회는 자체에 사랑의 능력이 없음을 알았을 때 교리를 강조하고 교령(敎令)을 집행하기 위하여 강력한 국가의 권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에 지금까지 제정된 모든 종교적 법령의 비밀과 아벨의 시대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핍박의 비밀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당신께로 이끄신다. 그분께서 사용하시는 유일한 강제 수단은 사랑의 강권이다. 교회가 세속적 권세의 도움을 구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 곧 거룩한 사랑으로 강권하는 능력이 부족한 증거이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각 교인에게 있으며 치유가 이루어져야 할 곳도 바로 여기이다. 예수께서는 비난하는 자들에게,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비난하는 정신을 버리고, 죄를 자백하고 버리라고 명령하신다. 왜냐하면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누가복음 6장 43절)기 때문이다. 그대가 빠져 있는 이 비난하는 정신은 악한 열매이며, 그 나무가 나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대 자신을 독선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심령의 변화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나무라는 위치에 서기 전에 먼저 이 경험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대개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마태복음 12장 34절)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생애에 위기가 닥쳐 그대가 조언이나 권면을 주고자 할 때, 그대의 말은 선을 위한 감화를 끼치되 평소에 그대 자신의 모본과 정신이 그대를 위해 확보해 놓은 정도만큼만 끼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선을 행하기 전에 먼저 선하게 되어야 한다. 128 그대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겸허하고 순수하고 부드러워지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감화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대에게 이런 변화가 이루어지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생애 하는 것이 마치 장미 덩굴이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포도나무가 자색 포도송이를 맺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서 “영광의 소망”이 되시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살피며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는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도와주고 축복하고 구원하는 것이 그대의 목적이 될 것이다. 잘못한 사람들을 취급할 때,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라디아서 6장 1절)는 말씀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 역시 여러 번 잘못을 범했다는 것과 한번 바른 길에서 떠나게 되면 다시 그 길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기할 것이다. 형제를 더욱 어두운 곳으로 밀어 넣지 않고 대신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그의 위험을 알려 주게 될 것이다.

갈바리의 십자가를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구주께서 그 곳에 달리셨음을 생각하고 그의 죄악의 정도를 다른 사람들의 것과 비교해서 헤아려 보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지 않을 것이다. 갈바리의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판이나 자만의 정신이 있을 수 없다.

잘못을 범한 형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체면은 물론 생명이라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비로소, 그대는 눈에서 들보를 빼고 형제를 도와줄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제서야 형제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를 감동시킬 수 있다. 129 어떤 사람도 책망과 비난 때문에 그릇된 처지에서 돌이킨 적은 없다. 도리어,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떠나고, 마음을 걸어 잠근 채 회개하지 아니하였다. 유순한 정신과 친절하고 마음을 끄는 행동이 실수한 사람을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가리워 줄 수 있다. 그대의 품성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대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주게 될 것이다. 매일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나타나시게 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대를 통해 당신의 말씀이 가진 창조의 능력, 곧 우리 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다른 영혼들을 재창조해 줄, 온유하고 설득력 있으면서도 강력한 감화력을 나타내실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마태복음 7장 6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죄의 종 된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부패하고 부도덕한 것에 빠짐으로써, 그들은 성품이 너무 타락하여 악에 집착하고 그것을 버리고자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복음을 다만 논쟁과 조롱거리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아무리 죄에 빠져 있을지라도 하늘의 귀중한 진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지나쳐 버리지 않으셨다. 세리와 창기에게 그분의 말씀은 새 생애의 시작이 되었다. 주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낸 막달라 마리아는 구주의 무덤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그분께서 부활하신 아침에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넨 사람이었다. 복음의 가장 확실한 원수 중 하나였던 다소 사람 사울은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종 바울이 되었다. 130 증오와 경멸의 모습 뒤에는 물론, 심지어 범죄와 타락의 이면에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 구주의 왕관의 보석처럼 빛날 영혼이 숨겨져 있을 수가 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장 7절).

주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대해 불신과 오해와 오역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약속을 주신다. 그분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하나님을,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부언하신다.

주께서는 그대가 그분의 자비를 갈망하고, 그분의 권고를 바라며, 그분의 사랑을 열망하는 것 외에는 아무 조건도 붙이지 않으신다. “구하라.” 구한다고 하는 것은 필요를 깨닫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하면 그대는 얻을 것이다. 주께서 당신의 말씀을 보증하셨으므로, 그 말씀은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 만일,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주께서 약속하신 것을 구하는 일을 주제넘은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와 같은 완전한 품성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축복을 구할 때, 주께서는 그대가 반드시 이행될 약속을 따라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증해 주신다. 그대가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고 깨닫는 자체가 그분의 자비와 동정을 구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131 그대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조건은 거룩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께 그대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모든 죄악에서 순결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든지 간구할 수 있는 것은 그분과 그분의 구원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크게 부족한 상태 곧 우리의 속절없는 처지이다.

“구하라.” 하나님의 축복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구하라.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기 22장 21절).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대를 찾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대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성령께서 이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이끄심에 순복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유혹받고 실수하고 믿음 없는 자들을 위하여 탄원하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교제할 수 있는 위치까지 높이시기 위해 애쓰고 계신다.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역대상 28장 9절).

“문을 두드리라.” 우리는 특별한 초청에 의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며, 그분께서는 우리를 알현실로 영접해 드리고자 기다리고 계신다. 예수님을 따른 최초의 제자들은 그분과 길가에서 몇 마디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고 물은 뒤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요한복음 1장 38, 39절)했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더없이 밀접한 친교와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편 91편 1절).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사람들로 하여금 확실한 보증을 가지고 자비의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면서, 주여,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주장하게 하라.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인 무리들을 보시고, 그 큰 무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식별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다. 132 그들의 필요와, 즐겨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예증으로, 그분께서는 그들 앞에, 육신의 부모에게 떡을 달라고 요구하는 배고픈 자녀의 비유를 제시하신다. 그분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겠는가”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부모가 자녀에 대해 본능적으로 가지는 따뜻한 애정에 호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그 누구도, 배가 고파서 떡을 달라고 하는 아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자녀를 소홀히 취급하며 자녀에게 기대를 가지게 하여 안타깝게 만들어 결국 실망하게 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자녀에게 훌륭하고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주기로 약속해 놓고 돌을 주겠는가? 어느 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의 호소에 응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함으로써 그분을 욕되게 할 것인가?

너희가 인간이며 또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1장 13절). 하나님의 대리자이신 성령이야말로 모든 선물 가운데서 가장 큰 선물이다. 각양 “좋은 것”이 이 선물 안에 포함되어 있다. 창조주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 위대하고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없다. 우리가 고통 중에서 주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하고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해 달라고 탄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시도를 결코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부모는 배고픈 자녀를 외면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필요해서 간절히 부르짖는 사람의 간구를 결코 거절하지 않으신다. 133 그분께서는 얼마나 놀라운 자비로써 당신의 사랑을 표시해 오셨는가! 다음 기별은 하늘 아버지의 심중에서 나온 것으로서, 암흑의 날에 그분께서 저들을 돌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이사야 49장 14~16절).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모든 약속은 우리에게 기도할 주제를 제공해 주고,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을 우리의 보증으로 제시해 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축복이 어떤 것이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구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바로 그것을 주께 아뢸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형편을 이야기하면서 생명의 양식과 그리스도의 의의 옷은 물론 현세의 떡과 의복까지 구할 수 있다.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대에게 이 모든 것이 필요함을 아시고, 그것들에 관하여 그분께 구하도록 그대를 초청하신다. 모든 은총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며 당신의 후한 선물로써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나아갈 때, 그대는 그분과의 관계를 자녀로서 인정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 그대는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할 뿐 아니라 그분의 사랑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일에든지 그분의 뜻에 순복한다. 그대는 그분의 사업을 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다. 예수께서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요한복음 16장 24절)라는 약속을 주신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자들이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선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저장되어 있다. 구주의 피라는 고귀한 희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귀중한 선물, 마음의 가장 큰 소원을 만족시켜 줄 선물, 영원토록 계속될 선물을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134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 그대로 그분 앞에서 간구하라. 그리하면 그대는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장 12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증해 주신 후, 예수께서는 인간의 모든 교제 관계를 망라한 광범위한 원리로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받아야 할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들의 걱정은,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권세와 존경과 봉사를 받기 위해 애쓰는 데서 생겼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받을지 염려하지 말고 얼마나 줄 수 있을지 염려하라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우리의 의무의 기준을 우리에 대한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찾는다.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때는 그들의 처지에 서도록 하라.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고충과 그들의 실망과 그들의 기쁨과 그들의 슬픔에 들어가라.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라. 그리고 그들과 처지가 바뀌었을 때 그들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라. 135 이것이 성실의 진정한 법칙이다. 이것은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9절)는 율법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선지자들의 교훈의 요지이다. 이것은 하늘의 원칙이므로 하늘의 거룩한 교제에 합당한 모든 사람에게서 계발될 것이다.

황금률은 진정한 친절의 원칙이며 예수님의 생애와 성품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아! 얼마나 부드럽고 아름다운 빛이 우리 구주의 생애에서 비쳐 나왔던가! 그분의 임재에서 흘러나온 향기는 또 어떤가! 이와 동일한 정신이 그분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자들은 거룩한 분위기로 둘러싸일 것이다. 그들의 순결한 흰옷은 여호와의 동산에서 풍기는 향기가 될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주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하고, 피곤하여 비틀거리는 발을 위하여 길을 밝혀 줄 것이다.

무엇이 완전한 품성을 이루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동정과 친절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은혜의 감화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감정을 세련되고 순결하게 하며, 하늘에서 난 우아함과 바르게 처신하는 분별력을 줄 것이다.

그러나 황금률에는 한층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의 청지기가 된 사람은 모두 무지와 암흑 가운데 있는 영혼들에게 그 은혜를 나누어 주되 그들과 처지가 바뀌었을 때 자신에게 나누어 주기를 그들에게 바라는 만큼 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사도 바울은 “헬라 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로마서 1장 14절)고 말하였다. 그대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이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고 타락한 사람보다도 더 그분의 풍성하신 은혜를 입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대는 그 영혼에게 이 선물들을 나누어줄 빚을 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의 선물과 축복 또한 그러하다. 136 그대가 동료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대는 은혜를 적게 받은 모든 사람에 대해 그만큼 빚진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재산이 많거나 생활의 안락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병든 자와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되 그들과 처지가 바뀌었을 때 그들에게 바라게 될 정도와 똑같이 돌보아야 할 더없이 신성한 의무를 진다.

황금률은 산상 설교의 다른 곳에서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로 동일한 진리를 암암리에 가르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은 선한 것이거나 악한 것이거나 간에 축복 혹은 저주의 형태로 우리에게 분명히 되돌아온다. 우리가 주는 것은 무엇이나 다시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세상의 축복은 같은 방법으로 되돌아 올 수가, 아니 종종 그렇게 되돌아온다. 우리가 주는 것은 필요한 때에 종종 네 배의 가치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 외에도, 우리는 하늘의 모든 영광과 그 보화의 총체가 되는 하나님의 더없이 풍족한 사랑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부터 온갖 종류의 선물로 보답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끼친 악 또한 다시 돌아온다. 정죄하고 낙심시키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해 온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들을 통과하게 한 그 땅을 자신도 지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동정과 친절의 부족 때문에 그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도록 정한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의 완고함을 미워하며 마음을 열고 예수께서 그 속에 거하시게 하도록 이끄신다. 그리하면 악이 선이 되고, 저주처럼 보이던 것이 축복이 된다.

137 황금률의 표준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교의 참 표준이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 기만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기까지 귀중하게 여기신 인간을 낮게 평가하며 사람들을 경하게 여기도록 이끄는 종교, 인간의 궁핍과 고난과 권리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종교는 거짓 종교이다. 가난한 자들과 고난당하는 자들과 죄 많은 자들의 요구를 무시할 때,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들임을 입증하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세상에서 이처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제의 생활에서는 그분의 품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은 이런 일로 인해 모독을 받는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신자들에게 비치던 희망찬 시대의 사도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아무도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지 않았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으며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행전 4장 32, 34, 33절, 2장 46, 47절).

하늘과 땅을 살펴보라. 우리의 동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의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보다 더욱 능력 있게 나타나는 진리는 없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진리이다. 138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황금률의 원칙을 실천할 때, 복음 사업에는 사도 시대에 나타난 것과 동일한 능력이 따를 것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마태복음 7장 14절).

그리스도 당시에, 팔레스틴 사람들은 대개 언덕이나 산 위에 위치한 성벽으로 둘린 마을에서 살았다. 일몰 때 닫히는 성문이 가파른 바윗길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는 행인들은 밤이 되기 전에 성문에 도착하기 위하여 힘든 오르막길을 열심히 서둘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늑장을 부리는 자는 성문 밖에 남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가정과 안식처로 이어지는 좁고 비탈진 길을 그리스도인의 노정에 대한 인상적인 상징으로 사용하셨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 앞에 제시한 길은 좁고 그 문이 들어가기에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황금률이 모든 교만과 자기 본위의 마음을 제거해 버리는 까닭이다. 물론, 넓은 길도 있다. 그러나 그 종말은 멸망이다. 만일, 영적 생애의 길을 올라가고자 한다면, 그대는 계속해서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르막길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적은 무리와 함께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많은 무리가 내리막길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전체가 온갖 세속적 마음과 이기주의와 교만과 부정직과 도덕적 타락을 가지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갈 수가 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의견과 주의에 따라 이기적인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무엇이나 할 소지를 가지고 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가는 데에는 따로 길을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문과 길이 넓어 발이 사망으로 끝나는 길을 향하여 저절로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그 입구가 험하다. 139 만일, 늘 따라다니는 어떤 죄를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그 길이 들어가기에 너무 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주님의 길을 계속해서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길과 자신의 뜻과 자신의 악한 습관과 행동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자는 세상의 의견을 따르거나 세상의 표준에 맞출 수 없다. 하늘의 길은 높은 지위와 부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기에도 너무 좁고, 자기중심적인 야망을 불태우기에도 너무 협소하며, 안락을 즐기며 오르기에도 너무 험하고 거칠다. 그리스도의 몫은 고통, 인내, 자아 희생, 비난, 궁핍 그리고 당신을 대항하는 죄인들의 반박이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낙원에 꼭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도 이러한 몫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올라가는 길은 힘든 길이며 내려가는 길은 쉬운 길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말라.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에도 줄곧 고통과 형벌이 있고, 슬픔과 실망이 있으며, 가지 말라는 경고가 있다. 부주의하고 완고한 사람들이 쉽게 자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사단의 길이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모두 기만이다. 악의 길에는 쓰라린 후회와 점점 깊어지는 고뇌가 있다. 우리는 교만과 세속적 야망을 좇는 것을 즐겁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종말은 고통과 슬픔이다. 이기적인 계획은 전도가 유망하게 보이도록 하고 즐거운 희망을 간직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 중심의 소망 때문에 행복이 깨어지고 생애가 비참하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리막길은 그 입구가 꽃으로 밝게 빛날지 모르나 가시가 있다. 입구에서 빛나던 희망의 빛이 절망의 흑암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끝없는 밤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된다.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그러나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언 13장 15절, 3장 17절). 140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모든 행동, 그분을 위한 모든 극기의 행동, 훌륭하게 견디어 낸 모든 시련, 유혹에서 거둔 모든 승리는 최후 승리의 영광을 향하여 나가는 행진의 발걸음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도자로 삼으면, 그분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길을 잃어버릴 필요가 없다. 떨고 있는 어떤 구도자도 순결하고 거룩한 빛 가운데서 걸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비록 길이 너무 좁고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죄가 용납되지 않을지라도,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의심하고 떠는 영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지 않으신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길이 험하며 오르막길이 비탈져 있고 우편과 좌편에 함정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행길에서 겪는 고통을 견디어야 할 것이다. 피곤할 때에도, 안식이 그리울 때에도 계속해서 수고해야 하며, 연약할 때에도 싸워야 하고, 낙심될 때에도 계속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인도자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마침내 소망의 항구에 틀림없이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 험한 길을 친히 걸어가셨고, 우리의 발을 위하여 그 길을 평탄하게 하셨다.

그리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은 비록 가파르지만 하나같이 피곤한 자들에게 생기를 주는 기쁨의 샘이 있다. 지혜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은 환난을 당할지라도 크게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사랑하시는 그분께서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들 곁에서 동행하시기 때문이다.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그들은 그분의 손길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고, 매 발걸음마다 보이지 않는 분에게서 나오는 더없이 밝은 영광의 빛이 그들의 길을 비추어 준다. 그리고 저들의 찬양의 노래는 더 높은 곡조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천사들의 노래와 합하기 위하여 상달된다. 141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언 4장 18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누가복음 13장 24절).

해가 지기 전에 성문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두르는 저문 길의 나그네는 길가에 있는 그 어떤 매력적인 것에도 한눈을 팔수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성문으로 들어가는 한 가지 목적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 생애에도 목적에 대한 이와 동일한 열성이 필요하다. 나는 너희에게 나의 나라의 참 영광인 품성의 영광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세속적 권력에 대해서 너희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지만 너희가 최고의 욕망을 가지고 노력을 쏟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세상의 대제국의 패권을 쥐기 위하여 싸우도록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싸워야 할 싸움이 없고 쟁취해야 할 승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라. 나는 너희가 나의 영적 왕국에 들어오기 위하여 노력하고 필사적으로 싸우라고 명령하는 바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의 싸움이며 진군이다. 그러나 얻어야 할 승리는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싸움의 장소는 곧 마음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 인류가 지금껏 싸운 가장 큰 싸움은 자아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 곧 마음을 사랑의 주권에 바치는 것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옛 본성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유전적 성향 곧 이전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영적 왕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암흑의 왕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거듭나지 않은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능력과 정욕이 자신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142 이기심과 교만은, 저희를 죄악적인 것으로 지적해 주는 것은 무엇이나 대항하여 싸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해 애쓰는 악한 욕망과 습관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강력한 원수를 정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수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자아와 또 자신의 의지와 습관을 정복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동의와 협력이 없으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수 없다. 성령은 사람에게 주어진 기능과 능력을 통하여 일하신다. 우리의 정력은 하나님과 협력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매 발걸음마다 열렬히 기도하며 자아를 낮추는 일 없이는 승리를 얻을 수 없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에 억지로 협력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보다 백배나 더 큰 강도(强度)로 그대를 강요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대를 하늘에 적합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단의 요새는 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대의 목적과 욕망과 성향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킬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대를 위하여 그 일을 이루어 주시되 심지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린도후서 10장 5절) 하기까지 하실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립보서 2장 12, 13절)신다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143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하늘나라의 영광에 매력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데 따르는 조건들을 만족시키려고 하지 아니한다. 넓은 길에는 그들이 걸어가는 길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죄악의 속박에서 빠져나오길 열망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죄악적 습관에 대항하고자 애쓴다. 그들은 좁은 길과 좁은 문을 바라보나, 이기적 쾌락과 세상에 대한 애착과 교만과 성화되지 못한 야망들이 그들과 구주 사이에 담이 된다. 자신의 의지와 자신이 택한 애정의 대상, 혹 직업을 버리는 것은 희생을 요구하나, 그들은 이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이며 돌아선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장 24절). 그들은 선을 바라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어느 정도 노력을 하나 그것을 택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선을 얻으려는 확고한 목적이 없다.

우리가 이기고자 할 때, 남은 한 가지 희망은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합치시키고 날마다 시간마다 그분과 협력하여 일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살리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일을 통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교만과 자부심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요구된 대가를 즐겨 지불하고 있는가? 우리의 뜻을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시키고 있는가? 기꺼이 그렇게 하기 전에는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144 사도 바울은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로새서 1장 29절)고 말하였다.

야곱은 그의 생애의 큰 위기에서 기도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은 품성의 변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을 때 원수인 듯한 자의 손이 그에게 닿았으며, 그는 밤이 맞도록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씨름하였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목적은 생명 자체가 위기에 놓였을 때도 바뀌지 않았다. 그의 힘이 거의 소진해졌을 때, 천사가 하늘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분이 야곱을 치자, 야곱은 자기와 싸우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상처를 입고 속절없는 상태로, 그는 구주의 품에 쓰러져 축복을 구하였다. 그는 조금도 비켜나지 않고 간구를 계속하였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이사야 27장 5절)고 한 당신의 약속에 따라 이 무력하고 회개하는 자의 간구를 들어 주셨다.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세기 32장 26절)고 하는 확고한 정신으로 간구하였다. 이 끈질긴 정신은 그 부조와 더불어 씨름하신 분에 의하여 심어졌다. 그에게 승리를 주신 분은 바로 이분이었다. 그분께서는 또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고치시고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 이니라”(창세기 32장 28절)고 말씀하셨다.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헛되이 씨름하여 얻고자 한 것이 자아의 포기와 확고한 믿음을 통하여 얻어졌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장 4절).

14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마태복음 7장 15절).

거짓 교사들이 일어나 그대를 좁은 길과 좁은 문에서 떠나게 하고자 할 것이다. 그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있으나 속으로는 노략질하려는 이리이다. 예수께서는 거짓 교사와 참 교사를 구별할 수 있는 시금석을 주신다. 그분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들을 시험할 때 그들의 훌륭한 연설과 고상한 말로 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을 받아야 한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이사야 8장 20절).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잠언 19장 27절). 이러한 교사들은 어떠한 기별을 전하는가? 그것이 그대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두려워하게 하는가? 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그분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일을 통해 그분을 향한 그대의 사랑을 나타내게 하는가? 사람이 만일 도덕상 율법의 중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교훈을 경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계명 중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친다면, 하늘에 의해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이 근거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흑암의 왕, 곧 하나님의 원수에게서 나온 일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고 그분의 휘장을 달고 있다고 해서 모두 그분의 백성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나의 이름으로 가르쳐 온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부족함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146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스스로 바르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라고 주장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큰일을 하고 있노라고 공언하지만 그들은 죄악의 일꾼들이다.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에스겔 33장 31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들에게 이런 사람과 같다.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에스겔 33장 32절).

말로만 제자라고 하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영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제시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믿어라, 믿어라, 그러나 율법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순종으로 이끌지 않는 믿음은 가정일 뿐이다. 사도 요한은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요한일서 2장 4절)다고 말한다. 특별한 섭리나 이적적 현상이, 하고 있는 사업이나 주장하는 이상의 진실성을 반드시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아무도 품지 못하게 하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하게 말하고 그들의 인상과 느낌과 행동을 거룩한 표준보다 높이 여길 때, 우리는 그들에게 빛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종은 제자가 되는 시금석이다.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 이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인 교리가 마음속에 있는 죄를 소멸시키고, 심령을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고 성결의 열매를 맺으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진리임을 알 수 있다. 147 자비, 친절, 긍휼, 동정이 생애에 나타날 때, 의로운 일을 하는 기쁨이 마음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기를 죽일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바른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한일서 2장 3절).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태복음 7장 25절).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크게 감동되었다. 진리의 원칙들이 담고 있는 거룩한 미가 그들을 끌었으며, 그리스도의 엄숙한 경고가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그들에게 들렸다. 그분의 말씀이 그들이 전에 가졌던 사상과 견해의 뿌리를 뒤흔들었다. 바꿔 말해,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려면 모든 사상과 행동의 습관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케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랍비들이 여러 세대 동안 지켜 온 관습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마음이 그분의 말씀에 반응을 나타내기는 하였으나, 그 말씀을 그들의 생애의 지침으로 받아들이고자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놀랍도록 생생하게 보여 주는 일례를 들면서 산상에서의 교훈을 마치셨다. 구주의 주변에 모여든 무리 가운데는 갈릴리 바다 부근에서 생애를 보낸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산 중턱에 앉아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동안 계곡과 산골짜기로 흐르는 시냇물이 바다를 찾아 흘러내려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48 여름에는 종종 이 시내들이 말라서 먼지가 나는 바닥만 남긴 채 완전히 없어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겨울의 폭풍우가 언덕 위에 쏟아지면 강은 맹렬하고 사나운 물결로 바뀌는데, 때로는 골짜기를 가득 채우며 저항할 수 없는 거센 물살로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가끔은 얼른 보기에 위험이 없을 것 같은, 농부들이 초원에 지어 놓은 농막들도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런데 산 위 높은 곳에는 바위 위에 지은 집들이 있었다. 그 지역 어떤 곳에는 완전히 돌로 지은 집들도 있었다. 그 중 많은 수가 폭풍우에 천 년을 견디어 왔다. 이 집들은 수고와 고생을 하며 지은 것들이었다. 이 집들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또 위치가 초원보다 인기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바위 위에 지어졌으므로 바람과 폭풍우가 몰아치고 홍수가 닥쳐도 이상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품성과 생애의 기초로 삼는 자는 반석 위에 이 집들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여러 세기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이사야 40장 8절)고 기록하였다. 베드로도 산상 설교가 있은 지 훨씬 후에 이사야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장 25절)고 부언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이 알고 있는 하나밖에 없는 불변의 것이다. 그것은 확실한 기초이다. 예수께서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장 35절)고 말씀하셨다.

율법과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위대한 원리가 산상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149 누구든지 말씀 위에 집을 짓는 자는 그리스도 곧 만세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있다.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그분 위에 집을 짓고 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린도전서 3장 11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계시이신, 다시 말해 그분의 품성과 그분의 율법과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생명의 현현이신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가 영구적인 품성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초가 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분 위에 집을 짓게 된다. 단순히 의를 즐기는 자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의를 행하는 자가 의로운 사람이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 결과이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이 가까운 곳에 장막을 쳤을 때 가나안에 대한 지식을 갖거나 가나안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그 좋은 땅의 포도원과 감람나무 수풀이 그들의 소유로 주어질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순종하는 가운데 그 땅을 점령함으로써, 조건에 응함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산 믿음을 활용함으로써, 그분의 약속을 그들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이를 실제로 그들의 소유로 만들 수 있었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은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의 선물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의 근거를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의로운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믿음에 두신다. 단순히 말만 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기대되고 있다. 품성은 행동을 통하여 형성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장 14절). 150 하나님의 자녀란 단순히 마음으로만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거나 가끔 그 능력에 굴복하는 자들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이다.

그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고 있는가? 그대는 암흑 가운데서 빛을 어떻게 찾을지 모르고 있는가? 그대가 가지고 있는 빛을 따르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라.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생명은 그분의 말씀 가운데 있다. 그대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순종할 능력을 주게 될 것이다.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빛에 유의할 때, 더 큰 빛이 오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집을 짓고 있으므로 품성이 그리스도의 품성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될 것이다.

참된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는 산 돌이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분 위에 집을 짓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진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베드로전서 2장 5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에베소서 2장 21절) 간다. 돌들이 기초와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공통적인 생명이 모든 사람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어떤 폭풍도 그 건물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으면 모두가 그분과 함께 사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은 전부 무너질 것이다.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인간적인 사상과 견해, 인간이 고안한 형식과 의식의 기초 위에 혹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상관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어떤 활동 위에 집을 짓는 자는 품성의 집을 흐르는 모래 위에 세우고 있는 것과 같다. 151 맹렬한 유혹의 폭풍우가 모래로 된 기초를 휩쓸고 그의 집을 세월의 해변에 하나의 난파선으로 남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이사야 28장 16, 17절).

그러나 오늘날 자비는 죄인들에게 호소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에스겔 33장 11절). 오늘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발하는 음성은 주께서 사랑하는 성을 바라보실 때 마음의 고통을 안고 부르짖으시던 그 음성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누가복음 13장 34, 35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은혜를 거절하고 멸시한 세상의 표상을 보셨다. 아, 완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여! 그분께서는 그대들을 위하여 울고 계셨다. 예수께서 산 위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던 당시만 해도 예루살렘은 회개하고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하늘의 선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때까지도 예루살렘이 당신을 받아들이길 기다리셨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사랑의 음성으로 그대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장 20절).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장 2절).

152 자신에게 소망을 두고 있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절박한 멸망을 피하는 데에는 아직도 영영 늦은 것은 아니다. 폭풍우가 몰려오기 전에, 확실한 기초로 피신하라.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28장 16절).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이사야 45장 22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장 10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5장 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