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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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내가…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태복음 5장 17절).

시내산의 우레와 불꽃 가운데서 율법을 선포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삼키는 불과같이 산꼭대기에 머물고, 주님의 임재에 산이 진동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땅 위에 부복한 채 두려운 마음으로 율법의 거룩한 교훈을 들었다. 축복의 산에서 있었던 장면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오직 새들의 노래만이 적막을 깨뜨리는 여름의 하늘 아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나라의 원칙을 설명하셨다. 그러나 이 날에 사랑의 음성으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께서는 시내산에서 선포된 율법의 원칙을 설명하고 계셨다.

율법이 주어졌을 때, 애굽에서의 오랜 속박 때문에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으로 감명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분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사랑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신명기 33장 2, 3절).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의 귀중한 유산으로 간직되어 온 이 놀라운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나타내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출애굽기 34장 6, 7절).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은 사랑의 원칙을 반포한 것, 즉 하늘의 율법을 땅에 계시한 것이었다. 그 율법은 중보자의 손으로 제정되고, 사람의 마음을 그 율법의 원칙과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에 의해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출애굽기 22장 31절)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의 목적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의 신성한 특성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너무도 자주, 그들이 공언한 순종은 사랑의 통치에 마음을 복종시켰다기보다는 형식과 의식을 따르는 것에 불과했다. 예수께서 당신의 품성과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고 자비롭고 은혜로운 속성을 나타내시고 단순한 의식적 순종의 무가치함을 드러내셨을 때,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를 너무 경하게 여긴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그분이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그들의 봉사의 중심이 되는 진리를 제시하셨을 때, 그들은 다만 외적인 것만 보고 그분께서 율법을 파괴하고자 한다고 비난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조용히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성과 능력으로 말씀하셨다. 47 그들은 랍비들의 생명 없는 유전과 부당한 요구의 되풀이려니 하고 들었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마태복음 7장 29절)에 놀랐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교수 방법과 그리스도의 그것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진리의 위엄과 순결과 미가 그 오묘하고 부드러운 감화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붙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구주의 거룩한 사랑과 친절이 사람들의 마음을 그분께로 이끌었다. 랍비들은 그분의 가르치심 때문에 그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모든 교훈의 취지가 무시되어 버린 것을 깨달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교만과 배타주의(排他主義)를 크게 만족시켜 온 격벽(隔壁)을 무너뜨리고 계셨다. 그들은 만일 허락만 하면 그분께서 사람들을 그들에게서 완전히 끌어갈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단호한 적의(敵意)를 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어떻게 하면 무리에게서 그분의 인기를 떨어뜨리고 산헤드린 회로 하여금 그분을 정죄하여 죽이도록 할까 하고 기회를 엿보았다.

산 위에서, 예수께서는 정탐꾼들에게 면밀한 감시를 받으셨다. 그분께서 의의 원칙들을 밝히실 때, 바리새인들은 그분의 가르치심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계명과 반대된다고 서로 속삭였다. 구주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신앙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동요케 할 말씀은 전혀 안 하셨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인 그가 백성들에게 전달해 준 거룩한 빛의 모든 광선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고 마음속으로 말하지만, 그분께서는 명백한 말씀으로 거룩한 계명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표명하신다. 48 그분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마태복음 5장 17절)고 말씀하셨다.

계명을 폐하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 아니라고 선언하시는 분은 인류의 창조주이시며 율법의 시여자(施與者)이시다. 천연계 속에 있는 모든 것, 곧 광선에 비치는 티끌로부터 하늘에 있는 세계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법칙 아래 있다. 천연계의 질서와 조화는 이 법칙을 순종하는 데 달렸다. 그러므로 지성적 존재의 생애를 주관하는 의의 큰 원칙이 있으며, 우주의 안녕은 이 원칙에 조화를 이루는 데 달렸다. 이 지구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의 율법이 존재하였다. 천사들이 이 율법의 원칙에 의하여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세상이 하늘과 조화되기 위하여서는 사람도 하늘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욥기 38장 7절)할 때, 에덴동산에 있는 사람에게 율법의 교훈을 알려 주셨다.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사명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은혜로 사람들을 돌이켜 율법의 교훈을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랜 후에 성령의 감동으로 영감의 기록을 남긴 사랑의 제자는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마치 항구적인 의무에 대해 하듯 한다. 그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한일서 3장 4절)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말한 율법이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요한일서 2장 7절)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그는, 창조 시에 있었고 시내산에서 다시 언급된 율법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가…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셨다. 49 그분께서는 여기서 “완전케 한다”는 말을, 침례 요한에게 “모든 의를 이루기”(마태복음 3장 15절) 위한 당신의 목적을 선언하실 때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표준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본을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이사야 42장 21절)는 것이었다. 율법의 거룩한 특성을 보여 주고, 그 광범위한 영향력을 제시하며, 그 영원한 의무를 명확히 밝혀 주셔야 했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신성미를 두고 이야기하자면, 가장 고상하고 온유한 사람도 그분을 희미하게 반사할 뿐이다. 솔로몬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만 사람에 뛰어난다…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아가 5장 10~16절)라는 말로 그분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예언적 안목으로 그분을 바라본 다윗은 그분에 대해 “왕은 인생보다 아름”(시편 45편 2절)답다고 말하였다. 아버지의 본체의 분명한 형상이시며,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극기의 구속주이신 예수님은 지상에서 사랑의 순례자로 지내시는 동안 하나님의 율법의 성격을 생생하게 나타내셨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하늘에서 난 사랑, 곧 그리스도 같은 원칙이 영원히 공정한 율법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율법에 순종하심으로써 변경할 수 없는 율법의 성격을 증거하시고, 아담의 모든 자손이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율법을 완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산 위에서 그분은 모든 것, 즉 인류와 관계되는 모든 것, 구원의 계획과 관련되는 모든 것이 성취되기 전에는 율법의 가장 작은 일획도 폐하지 않으리라고 언명하셨다. 50 그분께서는 율법이 결코 폐지될 수 없다고 가르치시며, 또 우리의 시계(視界)를 최대로 넓혀 그 끝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끝에 이르기 전에는 율법이 그 권위를 계속 보존하게 될 것이라고 확인하심으로써 아무도 율법을 폐지하는 것을 예수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천지가 존속하는 한,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한 원칙도 남아 있을 것이다. “산들과 같”(시편 36편 6절)은 그분의 의는 계속 축복의 근원으로서 대지에 생기를 주는 시냇물을 흘려보낼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변경이 필요 없을 만큼 완전하므로, 죄악적인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표준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구속주로 오신 이유였다. 예수님의 사명은 사람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어 하늘의 율법의 원칙과 조화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율법은 높여진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장 31절)고 말한다.

새 언약의 약속은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브리서 10장 16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분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가리킨 표상적 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십계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 의의 원칙은 영원한 보좌와 마찬가지로 변치 않는다. 율법의 한 조목도 폐지되지 않고, 일점일획도 변경되지 않았다. 에덴동산에서 생애의 큰 법칙으로 인류에게 알려진 그 원칙들은 회복된 낙원에서도 변치 않고 존재할 것이다. 51 에덴동산이 다시 지상에서 꽃 필 때, 태양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순종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시편119편 89절)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시편 111편 7, 8절)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를 궁구하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시편 119편 152절).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5장 19절).

말하자면, 이러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한 계명이라도 고의적으로 범하는 자는 다른 계명도 신령과 진정으로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야고보서 2장 10절).

죄를 이루는 것은 큰 불순종의 행위가 아니고 지극히 작은 것에서 하나님이 나타낸 뜻과 충돌을 빚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이 아직 죄와 교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마음은 섬기는 바에 따라 나누어진다. 거기에는 사실상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 곧 하늘 정부의 율법을 반역하는 일이 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요구에서 떠나 스스로 의무의 표준을 세울 것 같으면, 각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여러 가지 표준이 있게 되고, 주권도 주님의 손에서 빼앗게 될 것이다. 52 사람들의 뜻이 최고의 것으로 여겨지고, 높고 거룩한 하나님의 뜻, 곧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그분의 목적은 업신여김을 받고 무시될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의 길을 택할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치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있을 자리를 얻지 못할 것인데, 그것은 스스로 하늘의 원칙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인 사단의 편에 가담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한 말씀이나 여러 말씀으로 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말씀 하나라도 무시하면 안전할 수 없다. 율법 가운데서 이생과 내세에서 다 같이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지 않는 계명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울타리에 둘려 있는 것처럼 악에서 보호를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구축해 놓은 이 방호벽을 한 곳이라도 무너뜨리는 자는 그를 보호해 주는 그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가 들어와서 황폐케 하고 멸망시킬 길을 열어 놓기 때문이다.

우리의 첫 조상은 한 가지 점에서 감히 하나님의 뜻을 경시함으로써 이 세상에 재난의 수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본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같이 유사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각 교훈은 그분의 사랑이 기초가 되어 있기 때문에, 계명을 떠나는 자는 불행과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

53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장 20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랍비의 의식과 관례를 무시했다는 이유를 들어 죄인으로 몰았다. 때때로, 제자들은 그들이 종교 지도자로 존경해 온 자들에게서 비난과 공격을 받음으로 난처해지고 곤란해졌다. 예수님은 기만의 정체를 폭로하셨다. 그분은 바리새인들이 매우 가치 있게 여기는 의를 무가치한 것으로 선언하셨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특별하고 충성된 백성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종교를, 구원하는 믿음이 없는 것으로 나타내셨다. 그들의 가장된 경건, 인위적 고안과 의식, 심지어 그들이 자랑하는 율법의 외형적 준수까지도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음이 순결하지 못하고 품성이 고상하지도, 그리스도와 같지도 않았다.

율법주의적 종교는 사람을 하나님과 조화되게 하지 못한다. 바리새인의 까다롭고 완고한 정통, 즉 회개와 온유와 사랑의 결핍은 죄인들을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았다. 그들의 감화는 이 세상을 부패에서 방지하는 아무런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참 믿음은 심령을 정결케 하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라디아서 5장 6절)이다. 그것은 품성을 변화시키는 누룩과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을 선지자들의 교훈에서 배웠어야 했다. 54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고자 하는 심령의 절규와 이에 대한 답이 여러 세기 전에 선지자 미가에 의해 기록되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장 6~8절).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호세아 10장 1절)는 말로 바리새인의 본질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지적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의는 스스로의 사상에 따라 사리 사욕을 차리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열매였다. 그러므로 그 의는 그들 자신보다 더 나을 수 없었다. 스스로 거룩하게 되고자, 그들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끌어내려고 애썼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며, 그분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사람의 본성은 타락하고 훼손되어 하나님의 품성과 전혀 같지 않으므로, 사람 스스로는 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이기적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다 부정한” 것 같고,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이사야 64장 6절)다.

율법이 거룩한 것은 분명하나, 유대인들은 스스로 이를 지키는 것으로써 의를 얻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바리새인의 의와는 다른 성격의 의를 얻어야 한다. 5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완전한 율법의 의를 주셨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바로 하나님의 생명, 그분의 사랑이 그들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을 통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의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로마서 10장 3절)함으로써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자신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하는 것임을 계속해서 가르치셨다. 그것은 그분을 통해 하나님이 매일 그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마태복음 5장 22절).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해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 말며…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위기 19장 17, 18절)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진리는 선지자들이 가르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진리들은 마음의 완고와 죄에 대한 애착으로 흐려졌다.

구주의 말씀은 청중들에게, 다른 사람을 범죄자로 정죄하는 동안에는 그들 자신도 꼭 같은 죄인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56 왜냐하면 그들 역시 악의와 증오를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마주 보이는 바다 저쪽은 바산이라는 외딴 지역으로, 거친 골짜기와 나무가 무성한 언덕들 때문에 오래 전부터 각종 범죄자들이 잠복해 있기에 적합한 장소가 되어 왔다. 그 곳에서 자행된 강도와 살인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섬뜩하게 했으며, 많은 사람이 열을 내어 그 행악자들을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동시에, 그들은 성미가 급하고 투쟁적이었다. 그들은 로마인 압제자들에 대하여 더할 수 없는 적대감을 품고 있었으며, 다른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동포들이라 할지라도 모든 면에서 자신들의 사상과 맞지 않으면 마음대로 미워하고 멸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을 통하여, 그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고 있었다.

증오와 복수의 정신은 원래 사단에게서 나왔으며, 그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게 되었다. 적의(敵意)나 몰인정한 마음을 품는 자는 누구나 동일한 정신을 품게 되며 그 결과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씨앗 속에 식물(植物)이 들어 있는 것같이, 복수의 생각 속에 악한 행동이 들어 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한일서 3장 15절).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선물로 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각인의 영혼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시는지 보여 주셨다. 그분께서는 사람에게 서로 경멸하는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지 않으신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결점과 약점을 본다. 5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창조를 통한 소유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지불을 통한 소유, 곧 당신의 이중적(二重的) 소유로 주장하신다.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모든 사람, 심지어 가장 타락한 사람들까지도 존경과 친절로써 대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한 영혼을 모독하여 한, 한 마디의 말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책임을 지우실 것이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린도전서 4장 7절).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로마서 14장 4절).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구약 성경에는 “미련한 놈”이란 말이 배교자 혹은 자기 자신을 악의 지배에 맡겨 버린 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형제를 배교자 혹은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라고 비난하면 그 자신 또한 동일한 정죄를 받기에 합당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 자신도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사단과 싸우실 때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유다서 9절)셨다. 만일, 그렇게 하셨을 것 같으면, 사단의 뜻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방은 악한 자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사단은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요한계시록 12장 10절)로 불리어진다. 예수님은 사단의 무기를 하나도 이용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리라”(유다서 9절)는 말씀으로 그를 대항하셨다.

그분의 모본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원수와 싸울 때, 보복의 정신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욕하고 비난하는 언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58 하나님의 대변자로 서는 자는, 하늘의 주권자께서 사단과 싸우실 때 사용하지 않으시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판단하고 비난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형제와 화목하고”(마태복음 5장 24절).

하나님의 사랑은 미미하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원칙, 곧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하기 위하여 항상 흘러나오는 살아 있는 샘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속에 거하면 우리는 이웃에게 증오심을 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희생 예물은 제물을 바치는 자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참예자가 되었다는 믿음을 나타냈다. 그러나 사람이 말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사랑이 없는 정신에 빠지면 하나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형제에게 잘못하거나 손해를 입힐 때는 하나님의 품성을 그 형제에게 잘못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그는 잘못을 고백하고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형제에게 잘못한 것보다 형제가 우리에게 더 크게 잘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책임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59 하나님께 나갈 때, 다른 사람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면, 기도의 예물, 감사의 예물,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을 거기 두고, 우리와 불화한 형제에게로 가서 겸손하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형제를 속였거나 손해를 입혔으면, 보상해 주어야 한다. 만일, 부지중에 거짓 증거를 했거나, 형제의 말을 잘못 진술했거나,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의 감화력을 손상시켰으면, 그 사람에 관하여 대화를 나눈 사람들을 찾아가서 우리의 유해한 허위 진술을 모두 취소해야 한다.

만일, 형제들 사이에 있는 어려운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 공개되지 않고 당사자간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정신으로 솔직하게 이야기된다면 얼마나 많은 악이 방지되겠는가! 뭇 사람을 더럽히는 쓴 뿌리가 얼마나 많이 제거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분의 사랑 안에서 얼마나 밀접하고 부드럽게 연합될 수 있겠는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 28절).

유대인은 자신들의 도덕성을 자랑하고 이방인의 관능적인 행위를 가증하게 여겼다. 로마 제국의 통치로 팔레스틴에 들어오게 된 로마 장교들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실족케 하는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이방인들과 함께 이교의 습관과 음란과 방탕의 홍수가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가버나움에서, 로마 군의 장교들은 정부(情婦)와 함께 유원지에 나타나 산보하였으며,그들의 유람선들이 잔잔한 물위를 미끄러져 갈 때 자주 환락의 소리가 호수의 적막을 깨뜨렸다. 60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엄중히 책망하는 말씀을 듣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 자신의 마음에 있는 악을 폭로하시는 말씀을 들었으니, 그 놀람이 어떠했겠는가!

예수께서는 아무리 은밀한 중에라도 즐겨 악한 생각을 품을 때는 죄가 아직도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의 심령은 여전히 심한 증오와 죄악의 속박 가운데 놓여 있다. 불순한 장면을 상상함으로 쾌감을 느끼는 사람, 악한 생각을 품고 호색적인 표정을 짓는 사람은 드러난 죄 속에서 그것으로 인한 수치와 마음을 찢는 슬픔의 고통을 느끼며 그가 영혼 골방에 감추어 둔 악의 참 특성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이 유혹에 빠져 가증한 죄를 짓게 되는 때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악을 새로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숨겨 놓았거나 잠재해 있는 것을 나타내거나 명백히 하는 것에 불과하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잠언 4장 23절; 23장 7절)하다.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내 버리라”(마태복음 5장 30절).

병이 몸에 퍼져 생명을 빼앗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은 자신의 오른팔이라도 잘라내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61 영적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타락하여 사단에게 사로잡힌 영혼들은 복음을 통하여 구속(救贖)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려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죄의 필연적 결과인 고통에서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타락하여 훼손된 영혼은 순결해지고 변화되어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시편 90편 17절) 옷 입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로마서 8장 29절)아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린도전서 2장 9절). 오직 영원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 맞이할 영광스러운 운명을 드러낼 수 있다.

이 높은 이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혼을 넘어지게 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죄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의지를 통해서이다.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을 눈을 빼 버리거나 손을 베어 버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평생을 병신이나 절뚝발이로 보내기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자주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병신이 되고, 상처를 입고, 절뚝발이가 되더라도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좋다고 말씀하신다. 그대가 재난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최고의 유익에 이르는 길이 된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교통함으로써만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면, 목숨은 잠시 부지할지 모르나 생명은 소유할 수 없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디모데전서 5장 6절).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만 그분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62 예수께서는 자아의 굴복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받아들일 때에만 당신께서 지적해 주시는 숨은 죄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죄는 마음속에 감추고 사람의 눈에서 숨길 수 있다. 그러나 그러고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만일, 자아에 매달려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거절한다면, 사망을 택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죄가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하나님은 그것에 대하여 사르는 불이 되신다. 그러므로 죄를 택하고 죄에서 분리되기를 거절하면 그대는 죄를 사르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함께 불살라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은 희생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고상한 것을 위하여 저속한 것을, 신령한 것을 위하여 세속적인 것을, 영원한 것을 위하여 사라져 없어질 것을 버리는 희생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우리가 의지의 활용을 통해서만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를 순결하고 깨끗하게 된 상태로 다시 돌려받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또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과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실 수 있도록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것을 그분과 연결시켜 놓아야 한다. 강퍅하고 고집 센 자들에게는 이 같은 굴복이 참으로 쓰라리고 고통스러울지 모르나 “너희에게는 유익하니라.”

야곱은 절름발이가 되어 언약의 천사의 품에 속절없이 안기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정복케 하는 믿음의 승리를 알았으며 하나님의 왕자의 칭호를 얻었다. 에서의 무장한 군대가 그의 앞에서 조용해지고, 왕의 혈통으로 난 교만한 후계자인 바로가 그의 축복을 받기 위해 허리를 굽힌 때는 그가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창세기 32장 31절) 때였다. 우리의 구원의 주께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히브리서 2장 10절) 되신 것처럼, 믿음의 자녀들도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히브리서 11장 34절)였다. 63 마찬가지로,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이사야 33장 23절),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스가랴 12장 8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태복음 19장 3절).

유대인들은 지극히 사소한 허물을 가지고도 아내를 버릴 수 있었으며, 버려진 여자는 그때부터 재혼의 자유를 허용 받았다. 이러한 풍습은 큰 불행과 죄를 초래하였다. 예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결혼 서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혼인 관계가 깨어질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분께서는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 바리새인들이 이혼의 합법성에 관하여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창조 시에 제정된 결혼 제도를 상기시키셨다. 그분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9장 8절)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시고 심히 좋다고 선언하신 에덴의 복된 날들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결혼과 안식일은 그때에 시작되었고, 이 두 제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창조주께서는 거룩한 부부의 손을 혼인으로 연합시키실 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장 24절)는 말씀을 주심으로써, 아담의 모든 자손을 위한 결혼의 법칙이 마지막 때까지 유효함을 선언하셨다. 64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친히 좋다고 선포하신 것은 인류를 위한 최상의 축복과 향상의 법칙이었다.

인류에게 지키도록 위탁된 하나님의 좋은 선물들 중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결혼 제도도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었다. 그러나 그 제도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결혼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곧 그분께서 갈바리의 희생으로 구속한 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우호적이고 거룩한 연합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분께서는 “두려워 말라…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이사야 54장 4, 5절),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예레미야 3장 14절)고 말씀하신다. “아가서”에서 우리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가 2장 16절)라고 말하는 신부(新婦)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신부에게 있어서 “만 사람에 뛰어난”(아가 5장 10절) 그분께서는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아가 4장 7절)라고 당신의 택하신 자에게 말씀하신다.

그 후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와 신령한 몸의 구주가 되시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삼으심으로써 그를 아내의 보호자와 또 가족을 함께 묶는 가정의 띠가 되게 하셨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홈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니”(에베소서 5장 24~28절)라.

65 그리스도의 은혜, 오직 이것만이 이 제도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인류의 축복과 향상을 위한 제도가 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가정들은 연합과 화평과 사랑을 통해 하늘의 가정을 대표할 수 있다.

그리스도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사회의 형편을 보면 이 거룩한 관계에 대한 하늘의 이상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정과 기쁨을 바라던 곳에서 고통과 실망을 발견한 자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위로를 준다. 그분의 영께서 나누어 주실 수 있는 인내와 온유는 비참한 운명을 호전시켜 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거하는 마음은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남의 동정과 배려를 바라는 욕망이 사라질 것이다. 또, 하나님께 마음을 굴복시킴으로써 인간의 지혜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지혜가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통하여, 한때 냉랭하고 벌어졌던 마음들이 세상의 줄보다 더 튼튼하고 오래 견디는 줄, 곧 고난의 시험을 견디어 낼 사랑의 황금줄로 연합될 수 있을 것이다.

66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마태복음 5장 34절).

이 명령이 주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십자가의 인이 찍힌 채,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귀한 피의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 피가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말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마치 무슨 권리를 가진 것처럼 맹세할 수 없다.

유대인들은 셋째 계명을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스럽게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계명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다른 맹세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맹세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맹세로 인한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많은 계책을 고안해 냈다. 그들은 불경한 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물론, 법률을 기술적으로 피하여 어떻게든 감출 수만 있으면 거짓 맹세 또한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정죄하시고, 맹세하는 그들의 습관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일이라고 주장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께서는, 말하는 것이 진실이며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엄숙하게 부르는 법정에서의 선서는 금하지 않으셨다. 67 예수님 자신이 산헤드린 회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맹세하고 증언하기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대제사장이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장 63, 64절)고 대답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산상 설교에서 법정에서의 선서를 정죄하셨더라면, 재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을 책망하시고,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분 자신의 교훈을 강조하셨을 것이다.

아무 두려움도 없이 동료 인간들을 속이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도 창조주께 거짓말 하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또 하나님의 영을 통해 늘 깨우침을 받고 있다. 선서할 때, 그들은 단순히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것과 또 거짓 증언을 하게 되면 마음을 읽으시고 정확한 사실을 아시는 그분께 하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이 죄에 따르는 두려운 심판을 알기에, 그들은 무서워 자제한다.

맹세를 하고 일관성 있게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생활하며,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의 눈앞에 모든 생각이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정한 방법으로 선서하라는 요구를 받게 될 때, 말하는 것이 진실하고 오직 진리만을 이야기 한다는 것을 증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정당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맹세하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원칙을 세우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셨다. 그분은 정확한 진실이 말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68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의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의미 없는 빈말과 어귀들을 정죄한다. 이것은 사교계와 사업계에서 유행하는 가식적인 인사, 진실을 떠난 속임, 아첨하는 말, 과장, 상업상의 속임수 등을 정죄한다. 이것은 또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닌 것을 나타내고자 애쓰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진실하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유의하면 악한 추측과 불친절한 비평의 말이 다 점검될 것이다. 타인의 행동과 동기를 비평할 때, 그 누가 정확한 진실만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자만과 감정과 개인적 원한 때문에 얼마나 자주 다른 인상을 받게 되는가! 한 번의 눈짓, 한 마디의 말은 물론 음성의 억양까지도 거짓의 결정적인 방조자가 될 수 있다. 사실이 잘못 진술되어 본의 아닌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참된 것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햇빛과 같이 투명해야 하다. 진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나, 무수한 형태를 가진 악은 모두 사단에게 속한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바른 노선에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떠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악한 자의 권세 아래 내어 맡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확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쉽거나 용이한 일은 아니다. 진실을 알기 전에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선입관념과 편견, 불완전한 지식과 오판으로 얼마나 자주 우리와 상관된 문제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마음이 진리이신 분의 인도를 끊임없이 받지 않는 한 진리를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69 “너희 말은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골로새서 4장 6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에베소서 4장 29절). 이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산상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농담, 실없는 소리, 상스러운 대화 등을 정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말씀은 우리의 말이 진실할 뿐만 아니라 순결하기를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배운 사람들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예하지 말”(에베소서 5장 11절) 것이다. 그들은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에 있어서도 단순하고 정직하고 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입에 거짓말이 없”(요한계시록 14장 5절)는 거룩한 자들과의 교제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태복음 5장 39절).

유대인들은 로마 군인들과 접촉함으로써 수시로 울화통이 터지는 일을 경험했다. 로마 군의 부대가 유대와 갈릴리의 여러 지역에 주둔해 있었는데, 이들의 존재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한 국가로써의 자신들의 쇠망을 생각케 했다. 그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나팔을 크게 부는 소리를 듣고, 군인들이 로마의 국기 주위에 도열한 채 그들 국권의 상징에 경례를 하며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았다. 백성들과 군인들 간에 충돌이 빈번하였으며, 이 일은 일반의 증오심을 격발시켰다. 로마 관리가 호위병들과 함께 급히 이동할 일이 있을 때는 흔히, 들에서 일하는 유대의 농부들을 붙들어다가 짐을 지워 산을 넘게 하거나 필요한 다른 어떤 봉사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70 이것은 로마의 법률과 관습에 따라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런 요구에 반항하는 것은 모욕과 학대를 초래할 뿐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로마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자 하는 열망이 날이 갈수록 더 깊어 갔다. 대담하고 난폭한 갈릴리 사람들은 반항 정신이 특히 강했다. 국경 도시인 가버나움은 로마 수비대의 주둔지였다.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동안에도, 일단의 군인들을 본 청중들은 이스라엘의 굴욕을 생각하여 씁쓸해 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로마의 교만을 꺾어 주실 분이기를 바라면서 그분을 열심히 주목하였다.

예수께서는 슬픈 마음으로,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얼굴들을 살펴보신다. 그들의 얼굴에 찍혀 있는 복수의 정신을 주목하시며, 그들이 그들을 탄압하는 자들을 타도할 능력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알아차리신다. 그분은 슬픔에 잠긴 음성으로 그들을 향해,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명령하신다.

이 말씀은 구약 성경의 교훈을 반복한 데 불과한 것이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레위기 24장 20절)는 말이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의 한 조목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국가적 법령이었다. 어떤 사람도 복수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잠언 20장 22절),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잠언 24장 29절). 71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잠언 24장 17절),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잠언 25장 21절).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전부가 이 원칙을 나타내는 생애였다. 우리 구주께서 하늘의 집을 떠나신 것은 원수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가져다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는 비록 요람에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중상과 핍박을 쌓일 정도로 많이 받으셨지만 그때마다 용서와 사랑만을 나타내셨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이사야 50장 6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장 7절). 당신을 죽게 한 자들을 위한 기도와, 죽어 가는 도둑에게 전한 소망의 기별은 갈바리의 십자가를 통해 각 시대로 전달되고 있다.

아버지의 임재(臨在)가 그리스도를 두르고 있었으므로, 무한한 사랑이 세상의 축복을 위하여 허락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분께 닥치지 않았다. 여기에 그분의 위로의 근원이 있었으며, 이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감동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다. 이 사람을 겨냥한 강타는, 그를 당신의 임재로 두르고 있는 구주께로 떨어지게 된다. 그에게 닥치는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방벽이 되시므로, 그는 악을 대항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를 건드릴 것이 없다. 그리고 주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로마서 8장 28절)게 된다.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자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72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관헌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대신에 그들이 요구한 것 이상을 하라고 명령하셨다. 따라서 제자들은 의무가 국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일지라도 할 수 있는 한 그 모든 것을 이행해야 했다.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질 당시에는 가난한 자들을 매우 따뜻하게 보살필 것을 요구했다. 가난한 사람이 전당물이나 빚의 담보물로 옷을 줄 때, 채권자는 그것을 받으러 그 집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받을 담보물을 거리에서 기다려야 했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해 질 때는 그 전당물을 그 소유주께 반드시 돌려주어야 했다(신명기 24장 10~13절 참조). 그리스도 당시에는 이 자비의 처사가 거의 무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비록 법정의 판결이 모세가 인정한 율법 이상의 것을 요구할지라도 거기에 복종할 것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그것이 그들의 의복의 일부를 요구하는 것일지라도 거기에 복종해야 했다. 이에 더하여, 그들은 채권자에게 응당 치러야 할 것을 주는 것은 물론, 필요한 경우에는 법정에서 채권자에게 몰수해 가도록 권한을 부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어야 했다. 그분께서는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동행하라.

예수께서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부언하셨다. 동일한 교훈이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 73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신명기 15장 7, 8절). 이 성경 말씀은 구주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동정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렇게 주라고 가르치지 않으시고,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빌려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선물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누가복음 6장 35절)려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제로써 자신을 바치는 자는 자기 자신과 그의 굶주린 이웃과 나, 세 사람을 먹이게 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마태복음 5장 44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한 구주의 교훈이, 복수심이 강한 유대인들에게는 어려운 말이었으므로, 그들은 이에 대하여 불평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보다 더욱 강한 주장을 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것이 바로 랍비들이 냉혹하고 까다로운 강요의 법전으로 그릇 해석하고 있던 율법의 참 정신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기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출생한 특권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74 그러나 예수께서는, 용서해 주는 사랑의 정신이란 그들이 저희가 멸시하는 세리와 죄인들보다 더욱 고상한 동기로 행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임을 지적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 아버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청중들로 하여금 우주의 통치자를 주목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극진히 생각하시는지 이해시키려고 하셨다. 그분께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잃어버린 영혼을 돌보고 계신다는 것과,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편 103편 13절)신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성경의 종교 외엔 그 어떤 종교도 하나님에 대한 이 같은 개념을 소개한 일이 없었다. 이교(異敎)는 지존하신 분을 사랑의 대상자로보다 공포의 대상자로, 사랑의 선물을 자녀들에게 쏟아 주시는 아버지로보다는 오히려 제사로써 달래야 할 악독한 신으로 보도록 가르친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까지도 하나님에 대한 선지자들의 귀중한 교훈에 너무 눈이 멀어 있어, 아버지로서의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이 계시는 하나의 색다른 주제, 곧 세상에 주어진 새로운 선물처럼 되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 곧 유대인들 저희가 볼 때 랍비들의 요구에 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분의 불쾌히 여기심과 저주 아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것이 아니고 온 세상이, 다시 말해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당신의 사랑의 햇빛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진리는 누구나 다 천연계를 통해 이미 배웠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기 때문이다.

해마다 지구가 풍성한 소산을 내며 태양의 주위를 계속해서 공전하는 것은 고유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이 유성들을 인도하여 각각 자기 자리를 지키며 질서 있게 운행하게 한다. 여름과 겨울, 파종기와 추수기, 낮과 밤이 질서 있게 계속되는 것은 그분의 능력을 통해서이다. 75 식물이 잘 자라는 것은, 바꿔 말해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이다. 우리의 수중에 있는 모든 유익한 것들 곧 햇빛과 소나기, 매끼의 식사, 매 순간 유지되는 생명은 사랑의 선물이다.

비록 우리가 사랑스럽지 못하고 호감이 가지 않는 품성을 가진 “피차 미워한 자”였을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하셨나니”(디도서 3장 3~5절). 그분의 사랑을 받으면, 우리 또한 같은 모양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가장 허물 많고 죄가 많은 사람에게도 친절과 온유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품성에 참예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세속적 계급도, 혈통(血統)도, 국적도, 종교적 특권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 곧 온 인류를 품에 안는 사랑이다.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완전히 닫혀 있지 않으면 친절에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다. 미움에 대해서는 미움을 나타낼지라도, 사랑에 대해서는 사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증오에 대하여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감사할 줄을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게 하고, 보수를 전혀 바라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은 하늘 왕족의 표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들이 그들의 고상한 신분을 알려 주는 분명한 표이다.

76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장 48절).

“그러므로”라는 말은 하나의 결론, 곧 이전까지 진행되어 온 것에서 얻은 결론을 함축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청중에게 하나님의 확실한 자비와 사랑을 설명하시면서, 그러므로 완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누가복음 6장 35절)며, 우리를 높이시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셨으므로 누구나 품성에 있어서 그분과 같이 될 수 있고, 또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 흠이 없이 설 수 있다고 하셨다.

영생의 조건은 은혜를 통해 에덴동산 시절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그것은 곧 완전한 의, 하나님과의 조화, 그분의 율법의 원칙과의 완전한 일치이다. 구약에 제시된 품성의 표준은 신약에 제시된 것과 동일하다. 이 표준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명령이나 권고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약속 곧 매우 적극적인 약속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같이 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으셨으며, 또 사악한 의지를 개입시키지 않고 당신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이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때 그분에 대한 사랑이 움튼다. 그리스도의 매력적인 사랑이 계시되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완고한 마음은 녹아지고 부드러워지며, 죄인은 변화를 입고 하늘의 자녀가 된다. 77 하나님은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사랑은 그분께서 마음에서 죄를 제거하실 때 사용하시는 대리인이다. 사랑으로써, 하나님은 교만을 겸손으로, 적의와 불신을 사랑과 믿음으로 바꾸신다.

유대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에 이르고자 애를 쓰며 피곤해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의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그분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소유하게 될 의의 품성을 지적하신다. 산상에서의 설교를 통하여 그분은 의의 결과를 설명하시고, 지금은 또 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의의 근원과 그 성격을 지적하신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라.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에 불과하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통해 그분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원칙이 완전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줄기처럼, 사랑과 빛과 기쁨이 그분에게서 나와서 모든 피조물에게로 흘러간다. 이것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분의 생애 자체가 무아(無我)의, 사랑의 유출(流出)이다.

“그의 영광은 그 자녀들의 행복이며, 그가 기뻐하심은 자애로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

그분은 같은 방법으로 당신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우주에 대해 빛과 축복의 중심이 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작은 사회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의 빛이 우리에게 비췸으로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하게 된다. “그분의 선하심을 빌어서 선하게 되”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역에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는 우리의 영역에서 완전하게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78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일 것 같으면, 그분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 그분과 같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자녀는 그 아버지의 생애를 본받아 산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영으로 태어난 그분의 자녀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생애를 따라 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골로새서 2장 9절)시기 때문에, 그분의 생애가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고린도후서 4장 11절)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이루어지던 동일한 품성과 동일한 업적을 드러낼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율법의 모든 조목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시편 19편 7절)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하여 율법의 이로움이,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로마서 8장 4절)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