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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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무리 중에는 바리새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무리 가운데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것을 보고 예수를 경멸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보잘것없는 교사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세계의 으뜸이 되게 할 수 있으며, 아무런 재산도 없고, 권세나, 명예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능히 새 왕국을 건설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고.” 이 세상 정부 중에는 그것에 견줄 만한 것이 없었고 어떠한 사회단체도 그것을 나타낼 만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에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무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77 씨 가운데 있는 배종(胚種)은 하나님께서 그 속에 넣어 주신 생명력의 전개(展開)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왕국도 그와 같다. 그것은 곧 새 창조이다. 그 나라의 확장 원칙은 세상 나라들을 지배하는 원칙과는 정반대이다. 이 세상 나라는 완력으로 정복하고 전쟁으로 저희 주권을 유지하나 새 나라의 건설자는 평강의 왕이시다. 성령께서는 세상 나라들을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맹수(猛獸)들로 표상하셨는데,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으로 표상하셨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정책에는 완력을 써서 사람의 양심을 억압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도 세상 나라와 같은 방법으로 건설되는 줄로 생각하고 의를 조장(助長)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외형적인 수단을 썼다.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과 계획을 세웠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세우시고 진리와 의를 불어넣으심으로 오류와 악을 좌절시키신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여기저기에는 겨자나무들이 풀이나 곡식들보다 훨씬 크게 자라서 그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새들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아다니며 무성한 나뭇잎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겨자나무가 돋아난 겨자씨는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았다. 처음에 그 씨가 연약한 싹을 내지만 거기에는 강한 생명력이 있어서 그것이 자라고 커져서 결국에는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큰 나무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나라도 처음에는 미약하고 변변치 못하게 보인다. 세상 나라와 비교할 때에 그것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작은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신다는 주장을 조소하였다. 그러나 거룩한 생명력이 들어 있는 위대한 진리 속에서 복음의 왕국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위탁되어 있었다. 과연 그 나라는 얼마나 빨리 자라났고 그 영향은 얼마나 멀리까지 미쳤는가!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새 왕국을 대표할 사람은 몇 안 되는 갈릴리 천민들에 불과했다. 78 그들의 빈곤함과 수효의 적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는 순진한 어부들과 연합해서는 안 되는 이유로 거듭거듭 주장되었다. 그러나 겨자씨는 자라서 그 가지를 온 세상에 뻗을 것이며 한때 그들의 영화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세상 왕국들이 멸망해 버린 때에도 그리스도의 왕국은 강하고 위대한 힘을 가지고 그대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도 처음에는 지극히 미미하다. 한마디 말을 들려주고 한줄기 빛을 비춰 주고 새 생애를 시작하도록 감화를 끼친 결과를 누가 능히 측량할 수 있겠는가?

겨자씨의 비유에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성장이 설명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성장하는 각 계단의 경험들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에 당신의 교회를 위한 특별한 진리와 특별한 사업들을 가지고 계시다. 세상적으로 지혜 있고 유능한 사람들에게 숨겨진 진리가 어린아이같이 겸손한 자에게 드러난다. 진리는 극기를 요구한다. 진리에는 싸워야 할 투쟁이 있고 이겨야 할 승리가 있다. 처음에는 진리의 옹호자가 극히 적다. 그들은 세상의 위인들과 세속화된 교회로부터 반대와 멸시를 받았다. 유대 나라의 교만과 형식주의를 책망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했던 그리스도의 선구자 침례요한을 보라. 복음을 처음으로 유럽에 전한 두 천막 깁는 사람을 보라. 바울과 실라가 다른 일행과 같이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빌립보로 떠나갈 때에 그들의 사명은 얼마나 미약하고 희망이 없어 보였는가! 또 가이사의 영(營) 안에서 쇠사슬에 매여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나이 많은” 바울을 보라. 로마 제국의 이교(異敎)와 싸우는 작은 노예와 농부들의 무리를 보라. 이 세상 지혜의 걸작품인 강한 교회(천주교회)를 대항해서 싸우는 마르틴 루터를 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황제와 법왕에 맞서서 “저는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행할 수 없습니다. 79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라고 말하는 그를 보라. 형식주의와 육욕주의와 무신주의가 성행하던 시대에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전파한 존 웨슬리를 보라. 이교국의 비참한 현상을 보고 마음이 괴로워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기별을 그들에게 전할 특권을 얻고자 탄원하는 한 청년을 보라. 그의 호소에 대한 교회 만능주의적(敎會萬能主義的)인 대답은 이러하였다. “청년이여, 가만히 앉아 있으라.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믿게 하고자 하시면 그대나 나의 도움이 없이도 그 일을 하실 것이 아닌가.”

오늘날 종교계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여러 세기 전에 진리의 씨를 심은 이들을 칭송하며 그들의 기념비를 세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고상한 일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같은 씨에서 돋아나 자라난 것들을 짓밟아 버리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요 9:29) 하는 옛말이 아직도 되풀이되고 있다. 옛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이 시대를 위한 특별한 진리가 교회 당국자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너무도 무식하고 지혜가 부족한 남녀들에게서 발견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6~28), 이는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겨자씨 비유는 이 세상 마지막에 매우 현저하게 또 아주 영화롭게 성취될 것이다. 그 작은 씨가 나무가 될 것이다. 경고와 은혜의 마지막 기별은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계 14:6~14) 에게 보급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행 15:14)실 것이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그의 영광으로 환하여”(계 18:1)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