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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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훈을 말씀하실 때 심판의 경고와 자비의 초청을 연결시키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라”(눅 9:56(영문)),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당신의 자비로운 사명과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의 관계를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설명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에 대하여 경고하시면서 그 일에 대한 그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심하게 책망하셨다. 날씨를 미리 알려 주는 천기는 얼른 분별할 줄 알면서도 주의 사명을 명백하게 가르쳐 주는 때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때의 사람들도 오늘날 사람들같이 자기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책망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던 것이다. 청중들은 예수님께 그 당시에 큰 소란을 일으켰던 사건에 대하여 말했다. 유대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조치들이 백성들을 성나게 했다. 213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소동이 자주 일어났는데 빌라도는 이것을 폭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한 번은 그의 군대들이 성전 뜰 안까지 침입해 들어가 거기서 제물로 드릴 짐승을 잡고 있던 갈릴리인 순례자들을 죽인 일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봉변당한 자들의 죄로 인하여 이르러 온 천벌로 생각했고 이 사건을 예수님께 고한 사람들도 역시 속으로 만족하게 여기며 그 일을 말했다. 저희 생각에는 저희가 그러한 봉변을 당하지 않은 것은 봉변당한 갈릴리 사람들보다 훨씬 선하고 갈릴리 사람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은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 예수께서 정죄하시는 말씀을 하시기를 기대하였다.

제자들은 선생님의 의견을 들을 때까지 저희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주께서는 다른 사람의 품성을 평가하는 일과 사람의 좁은 판단력으로 다른 사람의 처벌을 헤아리는 일에 대하여 날카로운 교훈을 주신 일이 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비난하기를 기대했다. 예수의 대답은 저희를 몹시 놀라게 했다.

주께서는 무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깜짝 놀랄 재난은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저희 죄를 회개케 하기 위함이었다. 보응의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으며 머지않아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를 찾지 아니한 모든 사람을 덮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예언적 안목으로 예루살렘이 적군들에게 포위되는 것을 보셨다. 그는 이 택하신 성을 향하여 진군하는 이방 군대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그 포위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셨다. 유대인 중의 많은 사람은 그 갈릴리 사람들처럼 성전 뜰 안에서 바로 제물을 드리다가 죽임을 당했다. 개인들에게 내린 재앙은 또한 죄가 많은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되는 것이다. 214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잠시 동안 은혜의 시기가 연장되었으므로 아직 저희에게는 평화에 관한 일을 알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그의 말씀의 뜻을 오해할 수 없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온 포도나무에 비유해서 노래를 읊은 일이 있었다. 이사야는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사 5:7)고 말했다. 구주께서 오셨던 당시의 백성들은 주의 포도원 즉 당신의 특별한 보호와 축복의 울타리 안에 있는 무화과나무로 대표되었다.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그들 앞에 놓인 영광스러운 장래의 가능성이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말로 묘사되었다.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사 61:3) 야곱은 임종시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그리고 그는 다시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창 49:22, 25) 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명수가 솟는 샘가에 아름다운 포도나무로 심으셨다. 그는 당신의 포도원을 “심히 기름진 산”에 만드시고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사 5:1, 2)으셨다.

215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 5:2). 그리스도 당시의 사람들은 그 전 시대의 유대인들보다 더 경건한 체는 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영의 감화는 결핍되어 있었다. 요셉의 생애를 그처럼 향내나게 하고 아름답게 한 보배로운 품성의 열매는 유대 백성 중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열매를 찾으셨으나 얻지 못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땅을 폐하는 자들이었다. 이 백성의 존재가 오히려 저주가 되었다. 그 이유는 이 백성이 열매맺을 다른 의무가 차지할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백성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시는 축복을 빼앗아갔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올바로 소개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순히 쓸데없는 물건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의 결정적인 방해물이 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사람들을 너무나 잘못 인도해서 그들을 구원하는 대신에 멸망시키고 있었다.

비유 속에서 포도원지기는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어 버리겠다는 선고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열매 없는 나무에 대하여 포도원 주인의 관심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나무가 잘 자라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을 보는 것보다 그를 더 기쁘게 해주는 것은 없었다. 그는 그 포도원 주인의 요구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라고 하였다.

과원지기는 그처럼 희망이 없어 보이는 나무이지만 가꾸기를 거절하지 않았다. 216 그는 나무에 더 많은 손질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포도원의 환경을 가장 좋게 만들고 온갖 주의를 다 기울일 것이다.

포도원 주인과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에 대하여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하늘 아버지와 아들의 선민(選民) 즉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은 동일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청중들에게 좀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축복이 될 열매를 맺는 의의 나무가 되도록 하나님의 사랑이 고안해 낼 수 있는 온갖 방법이 다 동원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 속에서 과원지기의 수고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거기서 그의 이야기는 중단된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그분의 말씀을 들은 세대에게 맡겨졌다. 즉 그들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라는 경고를 받았다. 다시는 철회될 수 없는 그 선고가 발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는 그들에게 달려 있었다. 그 진노의 날은 매우 가까웠다. 포도원지기는 자비롭게도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재난을 통하여 열매 맺지 않는 나무의 멸망에 대하여 미리 경고하셨다.

발해진 경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무관심한 자들이여, 그대들은 주의 포도원의 열매 없는 나무가 아닌가? 운명을 결정하는 말이 오래지 않아 그대들을 향하여 선고되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왔는가? 또 주께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대의 사랑의 보답을 바라고 기다려 오셨는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겨지고 포도원지기의 주의 깊은 돌봄을 받아온 그대의 특권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얼마나 자주 부드러운 복음의 기별이 그대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던가! 그대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외적으로는 예수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지만 오히려 크신 사랑의 마음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조류가 그대를 통해 흐르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운 덕성인 “성령의 열매”가 그대의 생애에서 보이지 않는다.

217 열매 맺지 않은 나무도 비와 햇빛과 과원지기의 돌봄을 받고 있다. 그 나무는 땅에서 양분을 빨아들인다. 그러나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땅을 어둡게 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나무도 그 그늘 때문에 번성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그대에게 아낌없이 부어주신 하나님의 선물도 세상에 아무런 축복을 나누어 주지 못한다. 그대가 없었다면 응당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특권을 그대는 빼앗고 있다.

그대는 아마 희미하게나마 그대가 땅만 못쓰게 하는 자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몹시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아직 그대를 찍어 버리지 않고 계신다. 그는 그대를 냉정한 눈으로 보시지 않으신다. 그는 무관심하게 그대에게서 돌아서지 아니하시며 그대가 죽도록 내버려 두지도 아니하신다. 218 그분은 그대를 바라보시며 수백 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치시던 말씀 곧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호 11:8, 9)는 말씀을 외치신다. 긍휼이 많으신 구주께서는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나이다”라고 그대들을 위하여 대언하시고 계시다.

이 연장된 은혜의 기간에 그칠 줄 모르는 꾸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떠한 봉사를 하셨는지 생각해 보라. 그는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다. 그분의 승천 후에 복음은 먼저 예루살렘에 전파되었다. 거기서 성령을 부어 주셨고 거기서 초대 교회가 부활하신 구주의 권능을 나타냈다. 거기서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과 같”(행 6:15)은 얼굴로 주를 증거한 후에 죽었다. 하늘이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주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사 5:4)고 말씀하셨다. 그처럼 그대를 위한 그분의 돌보심과 수고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다. 그는 아직도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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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에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은 점점 완고해져서 마침내는 성령의 감화를 전혀 감지할 수 없게 된다. 바로 그렇게 되었을 때에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는 선고가 내려진다.

주께서 오늘 그대를 부르신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호 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