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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장-성찬식

53장 - 성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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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주님의 집의 상징들은 단순하고 똑똑히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상징들로 말미암아 표시된 진리들은 우리들에게 가장 깊은 의의가 있다. ― EV, 273.

그리스도께서는 두 제도와 그 의식에 따르는 두 큰 축제 사이의 전환점에서 계셨다. 흠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속죄물로 지금 막 바치려고 하였으며 이렇게 함으로 그분은 4천년 동안 당신의 죽음을 지적하여 온 예표와 의식의 제도를 끝내실 것이었다.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잡수실 때에 그분의 큰 희생에 대한 기념이 될 예식을 유월절 대신으로 세우셨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축제일은 영원히 끝나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예식은 각 시대를 통하여 모든 나라에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지켜야 할 예식이었다.

유월절은 애굽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해마다 자손들이 이 의식의 뜻을 물을 때마다 그 역사를 되풀이해서 말해 주도록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다. 이렇게 함으로 경이로운 구원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롭게 간직될 것이었다. 성만찬 예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로 이루어진 큰 구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주신 바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능력과 영광으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의식은 기념되어야 한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분의 위대한 사업은 우리 마음 속에 항상 새롭게 간직된다.

그리스도의 모본은 성찬 예식에 사람들을 제외시키는 것을 금하신다. 공개된 죄로 인해 죄지은 자가 제외되는 것은 사실이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가르치신다(고전 5:11). 그러나 이 이상은 아무도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이 경우에 참석시킬 것인가를 말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그 까닭은 누가 마음을 읽을 수 있겠는가? 누가 알곡에서 가라지를 골라 낼 수가 있겠는가?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그 까닭은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고전 11:28, 27, 29)기 때문이다.

합당치 못한 어떤 사람이 참석하였다는 이유로 아무라도 참석을 거부하지 말 것이다. 모든 제자들은 공개적으로 참석하므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증거하도록 요청을 받는다.

제자들과 함께 떡과 포도즙을 나누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구주가 되심을 서약하였다. 299 그분은 그들에게 새 언약을 선포하셨는데 이를 통하여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얻는다. 이 언약으로 금생과 내생을 위하여 내려 주실 수 있는 모든 축복은 그들의 것이 되었다. 이 언약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피로 비준(批准)될 것이었다. 그리고 성만찬의 집전은 타락한 전 인류의 한 부분으로서 개별적으로 저희 각개인을 위하여 희생하신 무한한 희생을 제자들 앞에 생각나게 할 것이었다.

종의 종

제자들이 다락방에 들어갔을 때에 그들의 마음은 적개심으로 가득 찼다. 유다는 왼편으로 그리스도의 다음 자리를 헤치고 들어갔으며 요한은 바른편으로 나아갔다. 만일 그 곳에 제일 높은 자리가 있다면 유다는 기어코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였는데 그 자리는 그리스도의 옆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유다는 반역자였다.

또 다른 알력의 원인이 있었다. 잔치가 있을 때에는 종이 손님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으며 이 때는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 항아리와 대야와 수건이 그 곳에 있었으나 종이 없었으므로 제자들이 이 일을 해야만 하였다. 제자들은 모두 자존심이 상할 그 종의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모든 제자들은 냉정한 무관심을 나타냈으며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듯 무감각하게 보였다. 그들은 잠잠히 앉아서 스스로 낮은데 처하여 겸손하기를 거절하였다.

서로 봉사하려고 움직이는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 한동안 기다리셨다. 그 다음에 거룩한 교사이신 예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셨다.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는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제자들은 놀라움으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조용히 기다렸다.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요 13:5)셨다. 이러한 동작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였다. 쓰라린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저희 마음에 가득 찼다. 그들은 무언의 책망을 이해하였으며 다 같이 새로운 빛 가운데서 자신들을 바라보았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들의 이기적 정신 때문에 그분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으나 그분은 그들의 갈등에 대하여 그들과 논쟁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분은 그들이 결코 잊지 못할 한 모본을 보여 주셨다. 제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쉽게 흩어지거나 꺼지지 않았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만물을 그의 손에 맡기셨고 당신은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분은 당신의 충만한 신성을 의식하셨지만 당신은 왕관과 왕복을 벗으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지상 생애에서 그분이 마지막으로 행하신 일들 중의 하나는 몸소 종과 같이 수건으로 허리를 두르시고 종의 일을 행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그분의 존엄성이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시키고자 하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무한히 높으신 분으로서 그분은 그 예식에 은혜와 의의를 부여하셨다. 300 그리스도처럼 높임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몸을 굽혀 가장 낮은 의무를 감당하셨다. 육적인 마음에 머무르며 자신을 섬김으로 굳어지는 그 이기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잘못 인도되지 않도록 하시고자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겸손의 모본을 보이셨다. 그분은 이 위대한 주제를 사람의 수중에 남겨 두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셔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분이 몸소 그의 제자들에게 종으로 행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가장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서로 다투고 있는 반면에 모든 사람이 그를 향하여 무릎을 꿇으며 영광의 천사들도 섬기기를 영광으로 생각하는 그분이 허리를 굽혀 자기를 주님이라 부르는 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분은 당신을 팔 자의 발을 씻기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 가운데서 단지 친절한 행동만을 하라고 명하신 것은 아니었다. 여행에서 더러워진 먼지를 없애려고 손님들의 발을 씻기는 데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종교적 예식을 세우고 계셨다. 우리 주님의 그 행동으로 이 겸손 예식은 성별된 예식이 되었다. 예수님의 겸손과 봉사의 교훈을 항상 기억하기 위하여 제자들은 이 의식을 지켜야만 하였다.

준비하는 의식

이 예식은 성만찬 예식을 준비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교만과 알력과 높고자 하여 다투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예수께서 당신의 겸손을 기념하여 먼저 준수하도록 지정하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의식에 나올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생명과 영광이 되시는 주님의 아래와 같은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2-17). 인간에게는 그의 형제들 보다 자신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자아를 위해 일하며, 가장 높은 자리를 구하는 성벽(性癖)이 있어서 이것들은 때때로 악한 억측들과 정신적 괴로움의 결과를 초래한다. 성만찬 예식에 앞서 행하는 의식은 이 오해들을 제거하고 인간에서 이기심을 쫓아내며 자고의 버팀에서 내려와 그의 형제를 섬기도록 겸손한 마음으로 이끄는 의식이다.

거룩한 순찰자가 이 때에 하늘에서 내려와 이 의식이 심령을 살피는 의식, 죄를 뉘우치는 의식, 그리고 사죄의 복된 보증의 의식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참석하신다. 당신의 충만한 은혜를 가지고 그리스도께서는 이기심이라는 수로를 통하여 흘러내려온 사상의 조류를 변화시키시려고 그곳에 계신다. 301 거룩한 성령께서는 저희 주님의 본을 따르려는 감각을 활발하게 하신다.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구주의 겸손을 기억할 때에 사상과 사상은 연결되며 일련 (一連)의 추억들, 하나님의 크신 인자(仁慈)와 지상 친구들의 호의와 친절이 떠오른다. 축복을 잊어버리고 자비를 남용하고 친절을 등한히 여긴 일들이 마음에 떠오른다.

이 예식이 바르게 거행될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도우며 서로 축복하는 거룩한 교제에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저희 생애를 무아적 봉사 사업에 바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봉사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일터는 주님이 가지셨던 그것처럼 넓다. 세계는 우리의 봉사를 요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가난하고 무력하고 무식한 자들은 각처에 있다. 다락방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봉사하기 위하여 나아갈 것이다.

모든 존재들의 섬김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사람의 종이 되고자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을 섬기셨으므로 모든 사람의 섬김과 영예를 받으실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속성에 참여하고 구속받은 영혼들을 바라보는 기쁨을 예수님과 나눌 자들은 그분의 무아의 봉사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기시키는 의식

그들이 식탁 주위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는 슬프게 들리는 어조로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15-18)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만찬 예식은 슬픔의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그런 목적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의 제자들이 주의 성탁 주위에 모일 때에 그들은 그들의 결점을 기억하고 슬퍼하지 말 것이다. 그들은 향상되었든지 저하되었든지간에 그들의 과거의 종교적 경험에 얽매이지 말 것이다. 그들은 그 들과 저희 형제들과의 차이점을 생각해 내지 말 것이다. 준비의 예식에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반성, 죄의 자복, 의견 충돌에 대한 화해 등 이 모든 것이 다 끝났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오는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의 그늘 아래 설 것이 아니요, 구원의 빛 가운데 설 것이다. 그들은 의의 태양의 밝은 빛에 심령을 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장 귀중한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마음으로 비록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분의 임재하심을 충분히 인식하는 가운데 그들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찢어진 육체와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즙을 받을 때에 우리는 상상 가운데 다락방에서 거행된 성만찬에 참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죄를 지신 분의 고민으로 성별된 동산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한 그 투쟁을 목격한다. 302 그리스도는 우리들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루신 희생이 얼마나 크고 의미 심장한 것인지를 더욱 충분히 깨닫게 된다. 구속의 경륜은 우리 앞에서 영광스럽게 빛나고 갈바리의 사상은 우리 마음 속에 활력있고 신성한 감정을 일깨운다.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돌리는 찬양이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있을 것이니 이는 갈바리의 장면들을 기억속에 생생하게 간직하는 영혼들에게는 교만과 자아숭배가 번성할 수 없는 까닭이다.

믿음으로 우리 주님의 큰 희생을 생각할 때에 그 영혼은 그리스도의 영적 생애와 같아지게 된다. 그 사람은 모든 성만찬 예식 때마다 영적 능력을 받을 것이다. 이 예식은 신자로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하는 산 연결을 이루고 그리하여 하나님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한다.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이것은 의존적인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연결을 이룬다.

성만찬 예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이것은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이 소망을 생생하게 간직하도록 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같이 모일 때는 언제나 어떻게 “예수께서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7-29) 하신 것을 자세히 말하곤 하였다. 환난 가운데서도 그들은 주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희망으로 위안을 받았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는 생각은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귀중하였다.

이것들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강권하는 힘이 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의 기억에 새롭게 간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시고자 이 예식을 제정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우리 영혼과의 연합이 있을 수 없다. 형제와 형제 사이의 연합과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굳게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만큼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효험있게 만드는 것이 없다. 우리가 즐거움으로 그분의 재림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분의 죽으심 때문이다.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의 소망의 중심이다. 그 위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고착시켜야 한다. ― 시대의 소망, 643-661(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