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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

19장 -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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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그리스도인과 불신자들과의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에 대하여 아주 놀랄만한 냉담함이 그리스도교계에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노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의 권면보다도 그들 자신의 마음의 경향을 따르기로 선택한다. 이생과 내세를 위하여 두편의 행복과 안녕에 중대한 관련이 있는 문제에 있어서 이성과 판단과 경건한 마음은 제쳐놓고 맹목적인 충동과 고집스런 결심과 같은 것이 이를 조종하게 한다.

다른 일에는 민감하고 양심적인 남녀들이 이 일에는 충고에 귀를 막고 친구들과 친척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의 호소와 탄원에 귀머거리가 된다. 경고와 경계의 표현은 주제넘은 간섭으로 여겨지고 충고를 할만한 성실한 친구들은 원수로 취급된다. 이 모든 것은 사단이 원하는 바이다. 사단이 그의 마력으로 사랑의 심령을 얽어매면 사람은 매혹되고 정신이 빠져 버린다. 이성은 욕망의 목에 매인 자제의 고삐를 푼다. 그리하여 너무 늦게 거기에 속은 사람이 불행과 노예의 생활에서 깨어나기까지 거룩하지 못한 정욕이 지배한다. 이것은 상상으로 그린 장면이 아니라 사실들에 대한 자상한 설명이다. 하나님께서 명백히 금지하신 그런 연합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윤허를 받을 수 없다.

여호와께서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 주변의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들로 더불어 잡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이라.”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합의 결과를 미리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함으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이라.”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하셨다.

신약 성경에도 그리스도인이 경건하지 못한 자로 더불어 결혼하는 데 대하여 금지하는 이와 비슷한 말씀들이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그의 첫째 편지에서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하였고, 다시 그의 둘째 편지에서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하였다.

121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금지된 지역에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되지 못한 마음이 그 욕망을 따라 하나님께서 재가하시지 않는 결혼을 하는 일이 너무 많다. 이 까닭으로 많은 남녀들이 희망도 하나님도 없이 이 세상에 산다. 그들의 고상한 포부는 죽고 그들은 환경의 사슬로 사단의 그물에 붙잡힌다. 정열과 충동으로 지배된 자들은 이생에서 불행한 수확을 거둘 것이요. 그들의 행로는 영혼을 잃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진리를 공언하는 자들이 불신자로 더불어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짓밟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총애를 잃고 회개하기에 쓰라린 일을 저지른다. 불신자가 훌륭한 덕성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나 여자가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그렇듯 큰 구원을 등한히 하였다는 사실이 그런 결합은 이상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의 품성은 예수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하고 말씀하셨던 청년과 비슷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필요한 한 가지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

때때로 그 불신자는 종교에 호의를 가졌고 다만 한 가지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 밖에는 모두가 다 반려자로서 만족할 만한 남자라는 구실을 말한다. 비록 불신자와 일생을 위한 연합을 하는 것이 부적당하다는 신자의 더 좋은 판단이 제의된다. 할지라도 열건 중에 아홉건은 자신의 경향대로 한다. 결혼 서약이 이루어지는 순간 영적 타락은 시작되고 종교에 대한 호의는 둔하여지며 신앙의 요새들은 계속하여 하나씩 파괴되어 두 사람이 나란히 사단의 검은 깃발 아래 서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결혼 잔치에 있어서까지라도 세속적 정신은 양심과 신앙과 진리를 누른다. 새 가정에서 기도 시간은 존중 되지 않는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는 선택하였으나 예수는 버렸다.

믿지 않는 자는 아마 처음에는 그 새로운 관계에 대하여 반대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나 성경 진리의 주제가 제시되어 주의와 고려를 촉구할 때에는 “그대는 내가 어떠한 사람인 것을 알고 나와 결혼한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의 권리를 침해받고 싶지 않다. 이제부터는 그대의 특이한 견해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두기로 하자”라는 감정이 일시에 일어난다. 만일 신자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 어떤 특별한 열성을 나타내 보이는 경우에, 그리스도인 경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불친절한 듯이 보여질 것이다.

신자는 자신의 새로운 관계에 있어서 자신이 선택한 짝에게 다소간에 양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22 사교적이요 세속적인 오락들이 장려된다. 처음에는 이런 일을 함에 있어 크게 싫은 기분이 들지만 진리에 대한 관심은 점차 적어지고 드디어 믿음은 의심과 불신으로 바꾸어진다. 굳세고 양심적인 신자요 헌신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지금처럼 의심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될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 그 변화는 지혜롭지 못한 결혼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세속적 결연을 맺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단은 많은 젊은 남녀가 결혼하는 것을 목도하는 그 때가 바로 그들의 종교적 경험과 유용성을 끝마치는 때 임을 잘 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잃어버린 바 된다. 그들은 혹 얼마 동안은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하려고 노력할 것이나 그들의 모든 노력은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강한 힘의 저항을 받아야 한다. 전에는 그들의 신앙과 소망을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특권과 기쁨이 되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운명을 함께한 이가 그것에 대하여 관심이 없음을 앎으로 그 주제를 말하기가 싫어지게 된다. 그 결과 귀한 진리에 대한 믿음은 마음으로부터 사라지고 사단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 주위에 회의론의 피륙을 짜 놓는다.

“두 사람이 합의하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그러나 다음의 광경은 얼마나 이상할까? 그처럼 밀접하게 연합한 이들 중에 하나는 신앙 가운데 있는데 다른 하나는 냉담하고 무관심하다면, 하나는 영원한 생명을 찾고 있는데 다른 하나는 죽음으로 가는 넓은 길을 가고 있다면 말이다.

허다한 사람들이 아직 교회에 들어오지 않은 이들로 더불어 결혼함으로 그리스도와 하늘을 희생시켰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가련한 인간과의 교제를 택할 만큼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교제가 그처럼 작게 평가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과연 귀하신 구주를 사랑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위하여 하늘의 기쁨을 걸고 모험하고자 할 만큼 하늘을 하찮게 평가하는가?

불신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답

종교적 원칙의 정당함을 시험하는 괴로운 처지에 놓이게 될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여야 할까? 그는 확고한 태도로 “나는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주일중 제칠일을 성경상의 안식일로 믿는다. 우리의 신앙과 원칙들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함께 행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더욱 완전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계속하여 나아간다면 나는 점점 더 세상과는 같지 않을 것이요, 그리스도의 형상에 더욱 동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지 아니하고 진리에 대하여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대는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세상을 사랑할 것이요 나는 그대가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사물들을 사랑 해야 할 것이다. 영적 사물들은 영적으로 분별된다. 영적 식별력이 없이는 그대는 내게 대한 하나님의 요구들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요 또한 내가 섬기는 주님께 대한 나의 책임을 깨달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종교상의 의무로 인하여 내가 그대를 등한히 한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는 행복하지 못할 것이요 그대는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애정 때문에 질투할 것이요, 나는 나의 종교적 신념에 있어서 혼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대의 견해들이 변하고 그대의 마음이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며 그대가 나의 구주를 사랑하기를 배우게 되면 우리의 관계도 새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123 신자는 그와 같이 자신의 양심이 인정하는 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희생한다. 그것은 그가 그것을 걸고 모험하기에는 영생을 너무 귀한 것으로 평가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예수님보다는 세상을 택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떠나게 하려고 하는 자와 자신의 인생의 중대사를 연결시키기보다는 결혼하지 않은 채 있는 것이 낫겠다고 느낀다.

현명하지 못한 약혼은 파혼하는 것이 더 낫다 그대가 결혼하려고 하는 이의 성품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비록 약혼 단계에 들어갔다고 할지라도 그 약혼 때문에 꼭 결혼 서약까지 해야 한다거나 또 사랑할 수도 존경할 수도 없는 이에게 그대 자신의 일생을 얽어매야할 절대 불가피한 필연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 것이다. 조건적인 약혼 단계에 이르는 일에 대하여 아주 조심성 있게 할 것이나 많은 사람들이 하듯이 결혼 후에 이혼하는 것보다는 약혼을 파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대는 혹 “내가 이미 약속을 했는데 이제 와서 그것을 취소한단 말인가?” 라고 말하겠지만 그대가 만일 성경의 원칙에 위배되는 약속을 하였다면 지체 하지 말고 반드시 취소할 것이며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그런 성급한 맹세를 하게한 경솔을 회개하라. 그런 약속은 그것을 지킴으로 그대의 창조주께 욕을 돌리기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취소하는 일이 훨씬 낫다.

결혼 관계에 이르는 모든 계단은 겸손, 단순, 신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열렬한 목적으로써 특징지어져야 할 것이다. 결혼은 이생에서나 내세에서를 막론하고 후일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못하실 그러한 계획을 세우지 말 것이다.

마음은 사람의 사랑을 사모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대신할 만큼 충분히 강하거나, 충분히 깨끗하거나 충분히 귀하지 못하다. 아내된 자는 오직 구주안에서만 인생의 염려와 책임과 슬픔에 대응할 지혜와 힘과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힘과 인도자로 삼아야 한다. 여인은 자기 자신을 세상의 아무런 친구에게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에게 드릴것이요 이 일에 방해가 될 상대와는 관계를 맺지 말 것이다. 참된 행복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는 그들이 가진 모든 소유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하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 매우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가정에 고통이 가득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까닭이다. 나의 자매여, 그대가 만일 그늘이 전혀 걷혀지지 않는 가정을 갖기를 원치 않는다면 하나님의 원수로 더불어 연합하지 말라.

결혼 후에 홀로 귀의(歸依)하게 된 자에 대한 권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결혼 관계에 들어간 남자가 후에 회심했을 경우 그는 그들의 종교적 신앙에 대한 견해가 아무리 다를지라도 아내에 대하여 신실해야 할 더 강한 의무하에 놓이게 된다. 124 또한 하나님의 요구는 비록 시련과 핍박이 따른다 할지라도 모든 세속적 관계보다도 높은 데 두어야 할 것이다. 사랑과 온유한 정신으로 하는 이같은 정절은 믿지 않는 자로 믿게 하는 감화력을 가지게 할 것이다. ― 재림신도의 가정, 48, 49, 61-69(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