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보감 1

본문보기

60장-잃은 것에 대한 비유*

60장 - 잃은 것에 대한 비유*

주제제목없음

305 잃은 양에 대한 비유가 내게 제시되었다. 아흔 아홉 양은 광야에 남겨 놓은 채,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섰다. 잃은 양을 찾았을 때, 그 목자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기쁨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 수고롭게 만든 일에 대하여 그 가련한 잃은 양을 비난하거나 불평하면서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기쁨으로 그 양을 짊어지고 돌아왔다.

그는 더욱 큰 기쁨을 표시하였다. 친구와 이웃들이 그와 함께 즐기자는 요청을 받았는데, 이는 “나의 잃은 양을 찾”은 까닭이다. 양을 찾은 것이 기쁨의 주제였으며, 곁길로 나아갔다는 사실은 염두에서 사라졌다. 발견의 기쁨이 잃은 양을 찾아 안전한 우리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당한 위기, 곤란, 염려, 상실의 슬픔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6, 7).

잃은 은전

잃은 은전은 잘못을 범하며 곁길로 나아가는 죄인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잃은 은전을 찾는 일에 있어서 여인이 나타낸 세밀함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정로에서 벗어나 잘못을 범하는 자들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가르친다. 그 여인은 빛을 밝게 하기 위하여 초를 켰으며, 은전을 찾기까지 집안을 쓸고 부지런히 찾았다.

하나님께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되는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여기에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다. 잘못을 범하는 자들을 흑암과 오류 가운데 버려두어서는 안 되며, 그들을 다시 빛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기 위하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306 촛불을 켜고, 흑암과 불신에 싸인 자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하늘의 빛을 위한 열렬한 기도로 진리의 명백한 점들을 찾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잘못을 범하는 자들이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말씀의 논리와 증거, 경고, 격려로 강화되어야 한다. 무관심과 등한은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받을 것이다.

은전을 찾았을 때, 여인은 그의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였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9, 10).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백한 후 형제들에게로 돌아오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하거늘, 스스로 잘못을 범하는 자들이요 하나님과 형제들의 용서를 매일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속임수에 속아 그릇된 길로 가서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한 형제 자매들이 돌아올 때 얼마나 더 기뻐해야 할 것인가!

잘못을 범하는 자를 멀리 하는 대신, 형제들은 그들이 있는 그 곳에서 만나야 한다. 그들이 흑암에 처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결점을 찾는 대신, 형제들은 좀더 신령한 은혜와 성경에 대한 보다 명백한 지식을 얻음으로 그들 자신의 등불을 밝혀서, 잘못에 빠진 자들의 흑암을 그들이 가져간 그 빛으로 몰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성공할 경우, 즉 그 잘못을 범한 자들이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빛을 따르기로 순복할 경우, 그들은 즐겁게 영접되어야 하며, 불평하는 정신이나 그들의 심한 잘못, 즉 특별한 노력, 걱정, 힘드는 노고를 하게 한 그들의 잘못을 깨우치려 하는 가운데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순결한 하나님의 천사들이 이 일을 기쁨으로 환호하였거든, 흑암 가운데 처하여 스스로를 돕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고 잘못을 범할 때 동정과 사랑, 그리고 조력을 자신들이 필요로 했던 그들의 형제들은 얼마나 더 기뻐해야 할 것인가!

탕자

307 나의 주의는 탕자의 비유로 이끌려졌다. 그는 아버지에게 유산 중의 자신의 몫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관심에서 자신의 관심을 분리시키고 자기의 몫을 그의 취향에 가장 잘 맞게 사용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그 요구를 들어주었고, 그 아들은 아버지의 권면이나 책망으로 괴롬을 당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아버지를 떠났다.

그 아들은 충고나 제재를 벗어나서 자기의 몫을 제멋대로 사용할 수 있을 때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상호의 의무감으로 마음에 부담 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받았으므로 아버지는 그를 아들이라고 주장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애로운 아버지에게 아무런 의무감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이기적이고 반역적인 정신을 품었으며, 아버지 재산의 일부는 자신에게 속한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그 아들은 아무것도 요구할 권리도 없고 가질 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몫을 요구하였다.

재산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이기적인 그는 재산을 받은 후 자신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아버지를 멀리 떠나갔다. 그는 제제를 싫어하였으며, 자신이 선택하는 길이나 방법을 통하여 쾌락을 얻으려고 단단히 결심하였다. 아버지가 그에게 나누어 준 모든 재산을 죄악적 방탕을 통하여 날린 후에, 그 땅은 기근이 들고 그에게는 심한 궁핍이 찾아들었다. 그 때에 그는 자신의 낭비적인 쾌락에 대한 죄된 행동에 대하여 후회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그가 탕진하던 재물에 있어서 궁핍하였고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죄악의 방탕에서 돼지를 치는 비천한 직업의 생활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비천해질 대로 비천해진 후에, 그는 아버지의 친절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 때에, 그는 아버지의 필요를 느꼈다. 그는 친구도 없고 궁핍한 처지에 빠졌다. 그 자신의 불순종과 죄가 아버지께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308 그는 아버지 집의 종들이 마음껏 누리는 특권과 풍족함을 생각하였다. 그는 지금 아버지의 집을 스스로 떠나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역경으로 인해 겸손하여진 그는 겸손한 고백과 함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안락한 옷은 커녕 볼 꼴 사납지 않은 옷조차 갖추지 못한 거지였다. 그는 궁핍으로 인해 비참한 몰골이 되었으며, 굶주림으로 인해 쇠약해졌다.

아버지의 사랑

아들이 아직 그의 집에서 먼 거리에 있었으나, 아버지는 그 방랑자를 알아보았다. 그의 첫번째 생각은 수 년 전에 방종의 죄된 길을 가기 위해 자신을 떠난 그 반역적인 아들에 대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끓어 올랐다. 아들의 퇴락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의 형상을 알아보았다. 그는 아들이 먼 거리를 걸어 자신에게 오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바삐 나아갔다. 그는 아들을 책망하지 아니하고, 그 아들이 죄된 행동으로 인하여 많은 고난을 당하였으므로, 가장 부드러운 동정과 사랑으로 아들에게 그의 사랑의 증거와 용서의 표징을 나타내는 일을 서둘렀다.

비록 그의 아들이 쇠약하여졌고, 그 얼굴에는 그가 보낸 방탕한 삶의 표적이 역력하였으며, 거지의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고, 그의 맨발은 여행의 흙 먼지로 더러워져 있었으나, 아버지의 가장 부드러운 동정은 아들이 그의 앞에 겸손하게 부복하였을 때 자극되었다. 그는 위엄을 갖추고 고자세를 취하거나 엄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는 아들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깊이 타락했었는가를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아들의 과거의 죄와 잘못들을 아들 앞에 열거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에게 입맞추었다. 그는 그 반역한 아들을 가슴에 안고 그의 부요한 옷으로 거의 벗은 그 몸을 감쌌다. 그가 그러한 따뜻함으로 아들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동정을 표명하였으므로, 아들이 아버지의 선하심과 사랑을 이제까지 의심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더 이상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결정을 했을 때 이미 자신의 죄에 대한 자책감을 느끼고 있었다면, 이러한 영접을 받았을 때에는 자신의 배은 망덕한 행위에 대해 더욱 심한 자책을 느꼈을 것이다. 309 이미 겸손해진 그의 마음은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을 인하여 이제 깨어졌다.

떨며 통회하는 아들은 쫓겨날까 봐 크게 염려했으며 이러한 영접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영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를 떠난 그의 죄를 인정하였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 15:21). 그는 그를 다만 품꾼 중의 하나로 보아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특별한 경의를 표할 것을 종들에게 분부하고, 그가 언제나 아버지께 순종한 아들인 양 그에게 좋은 옷을 입히라고 분부하였다.

시기한 형

아버지는 그의 아들의 돌아옴을 특별한 즐거움의 기회로 삼았다. 들에 있던 형은 그의 동생이 돌아온 사실을 알지 못했으므로, 기뻐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웬일인가 하고 종들에게 물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의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과, 그의 아버지기 동생을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처럼 맞이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사실이 설명되었다.

그러자, 형은 화를 내고는, 동생을 보거나 맞이하기 위하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불성실한 동생, 즉 아버지를 떠남으로 둘이 져야 할 의무 이행의 무거운 책임을 자기에게만 지도록 버려 둔 동생이 이제 그러한 영예를 누린다는 사실이 그의 분노를 일으켰다. 이 동생은 악한 방탕의 길을 추구하면서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재산을 날려 버리고 마침내 궁핍하게 되었다. 그 동안 집에 남아 있던 자신은 성실하게 아들 된 의무를 다하였다. 이제 이 방탕한 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자, 그가 이제까지 받아 본 어떤 것보다도 더한 존중과 영광으로 맞아들여진 것이다.

아버지는 형에게, 그의 동생을 잃었다가 찾았고, 그가 죄악 가운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이제 도덕적인 양심을 되찾아 자신의 악한 길을 미워하게 되었은즉 동생에게 가서 기쁨으로 그를 맞으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형은 항의하였다. 310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1).

아버지는 형에게 그가 항상 자신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과 자신의 소유가 다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켰으며, 그러나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그들이 기쁨을 표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득시켰다. 잃었던 것을 찾았고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이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다른 모든 생각을 능가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잘못을 범한 후 회개하는 자들을 하늘 아버지께서 영접하시는 방법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들은 아버지께 범죄하나, 아버지는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 동정심과 용서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서 방탕한 아들을 맞이한다. 또한, 효성스러운 마음이 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자신의 큰 죄와 등한히 하였던 것을 느끼고 아버지의 사랑을 감사하며 아버지의 요구를 인정하면서 돌아온 데 대한 그의 기쁨을 나타낸다. 죄의 길을 걸어갔으나 이제는 회개하는 아들이 그의 동정과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그는 안다. 이 아들은 고난을 당하였고, 자신의 부족을 느꼈으며, 그 큰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생각한 그의 아버지께 나아온다 방탕한 아들의 돌아옴은 가장 큰 기쁨의 근원이었다. 형의 불평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흔히 형제가 형제에게 이러한 태도를 취한다. 잘못을 범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잘못한 점을 깨닫도록 하며 계속 그들의 잘못을 상기시키려는 노력을 너무 많이 기울이고 있다. 잘못을 행한 자들은 동정, 도움, 긍휼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심적으로 고통을 당하며, 흔히 낙심하고 낙망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조건 없는 용서를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