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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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장-슬픔
11편정서적인 문제들

49장 - 슬픔

생명력을 파괴시킴

458 슬픔, 걱정, 불만, 후회, 죄책감, 불신, 이 모든 것들은 생명력을 파괴시키며 쇠퇴와 죽음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 …용기, 희망, 믿음, 동정, 사랑은 건강을 증진시키고 생명을 연장시킨다.-치료봉사, 241 (1905).

혈액 순환을 해침

슬픔으로 인해 혈관과 신경에서 혈액 순환이 둔화되며 간의 활동도 방해받는다. 이로 인해 소화 과정과 영양 섭취 과정이 방해받으며 모든 신체의 골수가 마르게 되는 경향이 있다.-Lt 1, 1883.

단 한 가지 악도 고칠 수 없음

슬픔과 염려는 단 한 가지 약도 고쳐 줄 수 없는 한편,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나 명량함과 희망은 다른 사람의 길을 밝게 해줄 뿐 아니라 “그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라”(잠 4: 22).-ST, 1885.2.1.(재림신도의 가정, 431).

모든 상황을 위한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음

우리는 미래의 어려운 문제들과 만족스럽게 생각되지 않는 미래의 전망을 예상하여 낙담하고, 무릎이 떨리고, 고개가 떨구어져서는 안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사 27: 5) 하고 말씀하신다. 459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의 지도와 그분을 섬기는 일에 완전히 바치는 사람들은 결코 주님의 대비책 없는 처지에 놓이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그분의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길을 지도해 주시는 인도자를 갖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난처한 문제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는 확실한 상담자가 있다. 우리의 슬픔과 사별의 고통과 외로움이 아무리 극심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동정심 깊은 친구가 있다.-치료봉사, 248, 249 (1905).

시련에 대한 예상으로 짐이 배가 됨

우리는 고통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어려움과 시련과 슬픔이 하늘 본향으로 가는 길 내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어려움을 미리 생각하기 때문에 인생의 짐을 배나 더 무겁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역경이나 실망을 당하게 되면 모든 것이 파멸될 것처럼 생각하고 그들이 당하는 운명이 가장 가혹하며, 그들이 분명히 궁핍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처럼 그들은 불행을 자초하고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늘을 던진다. 생애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짐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생각의 경향을 바꾸는 데는 단호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꾸는 일은 가능하다. 이생과 내세에서 그들의 행복은 그들의 마음을 즐거운 일들에 고정시키는 데 달려 있다. 그들로 하여금 상상에 불과한 어두운 장면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앞길에 흩뿌려 놓으신 은혜를 보게 하고, 또한 이런 것들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라.-치료봉사, 247, 248 (1905).

그림자를 드리움

우리는 과거의 있었던 유쾌하지 못한 모든 시간을 기억하고자 노력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나간 우리의 조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것들을 후회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면 우리는 곧 압도당하여 희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둠만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빛을 차단하게 되어 결국은 다른 사람의 앞길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게 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117 (1892).

복에 대하여 말하고 시련에 대해서는 적게 말하라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자비로우신 인해(仁愛)는 크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결코 떠나시거나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460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에 대하여 적게 생각하며 적게 말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대하여 더 많이 말한다면 우리들은 침울한 감정과 환난의 대부분을 초월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그대가 마치 어두운 길에 들어서는 것 같고 바벨론에 잡혀간 포로들처럼 생각될 때에 버드나무 위에 그대의 거문고들을 걸어놓고 즐거운 노래로 시련을 이겨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마 그대는 “나의 정망이 암담할 때, 슬픔과 사별의 멍에가 나의 영혼을 억누를 때 어떻게 노래할 수 있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슬픔으로 말미암아 전능하신 친구 예수님을 우리가 빼앗겨야 할 것인가? 그분의 독생자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계속적인 기쁨의 주제가 되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탄원을 은혜의 보좌 앞에 가져올 때 우리는 감사의 찬미를 부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 59: 23). 우리 구주께서 살아 계시는 한 우리가 끊임없는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할 이유가 있다.-RH, 1881.11.1.(가려 뽑은 기별 2권, 268, 269).

통제할 수 없는 슬픔으로부터 돌이키라(사별한 한 유족에게 준 권면)

욥처럼 그대는 슬픔에 대한 원인이 그대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위로를 받지 못했다. 이것이 합리적이었던가? 그대는 죽음이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권세임을 안다. 그러나 그대는 헛된 슬픔으로 그대의 생애를 거의 쓸모 없게 만들었다. 그대의 슬픔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거의 같은 정도의 것이었다. 나는 그대가 오로지 사별만을 생각하고 흥분하기 쉬운 감정에 굴복하여 마침내 그대의 시끄러운 슬픔의 표현 때문에 천사들이 얼굴을 가리고 그 장면에서 물러가기까지 된 것을 보았다.

그대가 이렇게 슬픔에 굴복하고 있는 동안, 그대는 독생자를 우리를 위하여 주셔서 죽음이 영원한 잠이 되지 않도록 해주신 하늘 아버지가 계신 것을 기억했는가? 그대는 생명과 영광의 주님께서 무덤을 통과하시고 그분 자신의 임재로써 그것을 밝게 해주신 사실을 기억했는가? 사랑받은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 13). 사도는 이 말을 기록할 때 무엇에 관하여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지 잘 알았다. 461 그러나 그대가 억제할 수 없는 슬픔에 굴복할 때 그대의 행동은 이 말이 나타내는 위로와 일치되는가?-교회증언 5권, 313 (1885).

자신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이기심임 (슬픔에 빠진 한 목회자에게 준 권면)

자 형제여, 자신에 대하여 계속 깊이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이기심이다. 연약성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자신을 주제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사도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대가 결코 경험하지 못했거나 앞으로 견대도록 부름을 받지 않을 그런 시험들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돌아선다. 그는 그것들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한다.

그대의 아내는 질병과 사망의 신민(臣民)이었다. 그대의 슬픔은 다른 모든 곤란들만큼이나 극심했다. 그대는 그 슬픔을 가슴에 꼭 껴안았으며, 그것을 깊이 생각하기를 좋아하였고, 이기적으로 그대의 마음과 생각이 슬픔으로 가득 차도록 허락했으며, 그 결과로 그대의 건강이 악화됐다. 그런 다음에 온 그대의 딸의 죽음은 실로 슬픈 타격이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더욱 고통스러운 환경 아래서 동일한 것을 겪어 왔다. 그대는 이런 고난이 그대의 기를 꺾도록 허용했다. 그대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서 말하며, 스스로 변경시키거나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인해 화나게 되었다. 그대가 행한 것처럼 이런 고난들 중 어느 것에 빠지는 것은 죄이다. 나는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지 안다. 마음이 슬픔으로 흐려질 경우, 음식은 소화되지 않고, 그 결과로 신체는 자양분을 잘 공급받지 못한다.-Lt 1, 1883.

슬픔으로 혈액이 뇌로 쏠리게 됨 (개인적인 경험)

이와 같이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동안, 나는 짧은 순간 나의 생명력이 마비되는 것처럼 마음의 번민을 안겨 주는, 표현할 수 없는 정신적 억압을 느꼈다. 나는 사흘 밤을 거의 잠들 수가 없었다. 번민하고 괴로웠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남편과, 우리의 정(情)을 같이 나누는 가족에게 나의 감정을 숨겼다. 462 내가 조석에 예배 시간에 가족과 연합하여, 무거운 짐을 져 주시는 위대하신 분께 나의 짐을 내려놓고자 애쓸 때에, 아무도 나의 수고와 마음의 부담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탄원은 번민으로 찢어진 마음에서 나왔고, 나의 기도는 억제할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조리가 없고 앞뒤가 맞지 않았다. 피가 뇌로 쏠려가 빈번히 비틀거리게 하고 거의 쓰러질 지경으로 만들었다. 나는 자주 코피를 흘리게 되었는데, 특별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한 우에 그러했다. 나는 글 쓰는 일을 제쳐놓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내게 지워진 염려와 책임의 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교회증언 1권, 576, 577 (1867).

슬픔을 어찌할까

그대는 오늘 슬픔에 가득 차 있는가? 그대의 눈을 의의 태양에 붙들어 맬. 그대는 모든 난관에 적응하려고 시도하지 말고 얼굴을 빛으로, 하나님의 보좌로 돌려라. 거기서 그대는 무엇을 볼 것인가? 언약의 무지개, 하나님의 살아있는 약속을 볼 수 있다. 그 밑에는 시은좌가 있으며, 준비된 자비의 대비책들을 스스로 활용하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의 공로를 자기의 것으로 삼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보좌가 존속하는 한 언약의 무지개 안에서 아버지께 가납받는다는 복된 보증을 가지고 있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고 영생을 취하라. 그것은 처절한 싸움일 것이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싸움을 하라. 이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고 “아멘”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의 손을 내밀어 그리스도의 손을 잡으라. 정복되어야 할 어려움들이 있지만, 능력이 탁월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협동할 것이다.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고, 엄숙한 도성으로 매진하라. 영광스러운 면류관과 하늘의 베틀로 짠 두루마기가 이기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사단이 그의 사악한 그림자를 그대의 길에 가로질러 던지고, 땅에서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뻗어 있고, 그 위로는 구원얻을 후사들에게 부리는 영들인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신비한 사닥다리를 보지 못하도록 가리려고 애쓸 것이지만, 그럼에도 위를 향하여 매진하면서 그대의 발을 한 발 한 발 힘차게 내디디고 무한하신 분의 보좌로 나아가라.-Und MS 23.

동조하는 자들이 항상 친구들은 아님

463 그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대의 말과 사상의 흐름을 돌이키려고 애쓰는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모두 사실인 양 그대의 모든 인상에 공감을 표시한다면, 그대가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적게 교제할수록 그대에게는 더 낫다. 그들은 그대의 친구가 아니라 가장 나쁜 원수들이다. 주님께서는 그대가 명랑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대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장사지냈다. 나도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왜 당신께서 저를 풀무불 속에 던져 넣으셨나이까, 왜 제가 거듭된 고난을 받아야 하나이까”라고 감히 묻지 않았다. 그 답은 다음의 같은 취지의 말씀으로 내게 되돌아온다.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 13: 7).

하나님의 목적은 종종 신비 속에 가려 있다. 그것들은 유한한 마음에는 불가해 하다. 그러나 시초부터 시말까지 보시는 분은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을 수 있도록 모든 세속성을 씻어 버리고 그리스도인 품성을 온전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Lt 1, 1883.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일할 때 슬픔이 경감됨

그 사도는 이제 막 떠나오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편견, 증오 그리고 박해에 잘 대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하는 가운데 그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들을 잊었다. 그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되풀이하여 말해줌으로써 그의 처형 장소로 그와 동행했던 몇 안 되는 그리스도인들을 강화시키고 격려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그분의 시련을 받고 신실한 자녀들에 관하여 말씀하셨던 모든 것은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했다.

한동안 그들은 여러 가지 시험들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울지 모른다. 그들은 세상적인 위로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심령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보증으로 격려할 수 있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머지않아 시련과 고난의 밤은 끝나고 평화와 완전한 기쁜 아침이 동터 올 것이다.-RH, 1912.1.4.

최선의 위로자들

464 가장 큰 슬픔들을 견뎌 온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를 주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햇빛을 가져다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서 단련을 받고 감미롭게 되었다. 그들은 환난이 그들을 공격했을 때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그분의 보호하시는 사랑에 더욱 가깝게 매달렸다. 이런 사람들은 빛뿐 아니라 어두움도 만드시고, 우리의 선을 위하여 우리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돌보심에 대한 산 증인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다.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 귀중한 빛! 우리는 그 빛 안에서 살도록 하자! 슬픔과 불평에는 작별을 고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HR, 1877년 10월 (가려 뽑은 기별 권, 274).

슬픔의 해독제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처에 바를 수 있는 향유를 예비하셨다. 465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으며 그곳에는 의사가 있다. 그대는 과거에 없던 열심을 나타내어 성경 말씀을 연구하지 않겠는가? 모든 위기에서 지혜를 얻기 위하여 주님께 간구하라. 시련을 당할 때마다 그 난관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달라고 예수님께 호소하라. 그렇게 할 때에 그대의 눈이 열려 구제책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거룩한 말씀 가운데 기록된 치료의 약속이 그대의 형편에 적용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면, 원수가 그대를 한없는 애도와 불신의 함정에 빠뜨릴 수 없게 될 것이며 그 대신에 그대는 주님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대에게 명민한 식별력을 주심으로써 모든 축복을 발견하게 되고 슬픔에 대한 해독제가 될 것이며 그대의 입술에 놓여지는 어떤 쓰디쓴 물방울도 달게 하는 나뭇가지 역할을 할 것이다. 모든 쓴 물방울은 예수님의 사랑과 혼합될 것이며 쓴 물에 대해 불평을 하는 대신 그대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슬픔과 뒤섞여서 그것이 누그러지고 거룩하며, 성화된 기쁨으로 변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Lt 65A, 1894.(가려 뽑은 기별 2권, 273, 274).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로 영혼이 고뇌에 빠짐

그리스도의 고통을 그처럼 격심하게 만든 것 아버지의 은총으로부터의 분리로 초래된 고뇌였다. 영혼의 고민이 그에게 이르렀을 때에,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 44). 이런 절대절명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버리셨다는 생각으로 야기된 그분의 두려운 고민은,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로부터 물러가셨다는 것을 죄인들이 너무도 늦게 깨달을 때 느낄 고뇌를 나타낸다.-MS 134, 1905.

우리가 낙원에서 거닐 때에 이해함

세상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낙원에서 구속주와 함께 거닐 때까지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역사가 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 17).-MS 28, 1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