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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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장-초기 개혁자들

46장 - 초기 개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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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법왕 지상권이 오랜 기간에 걸쳐 세상을 덮고 있던 암흑 속에서도 진리의 빛이 완전히 꺼지지는 아니하였다.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증인-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믿고 성경을 유일한 생활의 표준으로 삼으며 참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무리들-이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이 사람들의 덕을 입었는지 후손들은 결코 모를 것이다. 저희는 이단으로 낙인 찍혀, 저희의 동기가 비난을 당하고 저희의 품성은 비방을 당하며 저희의 저술은 압제를 당하고 와전(訛傳)되고 훼손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저희는 굳건히 서서 각 시대를 통하여 저희 믿음을 순결하게 유지하여 후손들에게 물려 줄 신성한 유산으로 삼았다.

성경에 대한 핍박이 너무도 가혹하여 어떤 때에는 단지 몇 부밖에 남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완전히 멸절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성경의 진리는 영원히 감추어질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옥문과 굳게 닫힌 철문을 열어 그의 종들을 놓아 주신 것처럼 생명의 말씀도 쉽게 쇠사슬에서 해방시키실 수 있으셨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감추인 보화를 찾듯 열심히 진리를 탐구하였다. 하나님의 섭리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들은 깊은 흥미를 가지고 거룩한 성경 말씀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성경의 빛을 받아들이고자 원하였다. 336 저희는 모든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오랫동안 파묻혀 있던 수많은 진리를 찾아냈다. 그들은 하늘에서 파송된 사자와 함께 전진하며 오류와 미신의 쇠사슬을 끊고 오랫동안 결박되었던 자들에게 일어나 그들의 자유를 주장하라고 권면하였다.

여러 나라 백성들에게 각각 그들의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하여 배포해 줘야 할 때가 이르렀다. 세상은 이제 한밤중이 지났다. 캄캄한 시간은 지나고 여러 나라에서는 여명의 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새벽별

14세기에 들어서 종교개혁의 새벽별이 영국에서 떠올랐다. 요한 위클리프는 개혁의 선구자로 영국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국을 위한 개혁자였다. 그는 청교도의 선구자이었고 그가 살던 시대는 사막의 오아시스가 되었다.

주께서는 이 개혁 사업에 품격과 위엄을 가져다 줄 만한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이 사업을 맡기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 사업을 멸시하는 소리를 잠잠하게 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개혁자들의 무식을 조롱하여 개혁 사업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위클리프는 학교에서 배우는 학문을 통달한 후에 성경 연구를 시작했다. 성경 속에서 그는 이전에 그토록 찾고자 애썼지만 찾지 못하던 것을 이제 찾게 되었다. 그는 성경 속에서 구원의 계획과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한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보았다. 그는 로마교회가 성경의 진리를 버리고 인간의 전통을 택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바치고 그가 발견한 진리를 선포하기로 결심하였다.

위클리프의 일생의 최대의 업적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성경 전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 당시에는 인쇄기가 아직 발명되지 못하였던 때라 그가 번역한 성경을 여러 벌 만드는 데는 큰 수고와 오랜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337 그러나 이렇게 하여 영국 사람들은 성경을 저희 방언으로 읽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암흑을 뚫고 찬란하게 비추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대 종교개혁 사업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셨다.

인간의 이성(理性)에 대한 호소는 많은 사람들을 법왕청의 교리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데서부터 그들을 각성시켰다. 특별히 상류 계층에서 성경이 크게 환영받았는데, 이것은 당시에 있어서 상류 계층만이 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이제 개신교의 뚜렷한 기별,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성경은 절대 확실하여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쳤다. 많은 신부들이 그와 협력하여 성경을 널리 보급하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사람들의 노력과 위클리프의 저술은 매우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영국 국민의 거의 절반이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암흑의 세력이 떨기 시작하였다.

위클리프의 사업을 중지시키고 그를 살해하려던 원수들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61세로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하는 중에 평화스럽게 잠들었다.

종교개혁의 확산

보헤미아의 요한 후스가 로마교의 많은 오류를 지적하고 나서서 개혁 사업에 착수한 것은 위클리프의 저술 때문이었다. 후스는 위클리프처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며 학식이 있고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정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성경에 대한 호소와 신부들의 야비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대담하게 꾸짖은 것이 널리 관심을 불러일으켜 수천명이 기쁜 마음으로 이 순수한 믿음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법왕과 승정(僧正)과 신부와 수도승(修道僧) 등의 분노를 일으켜 후스는 이단 혐의에 답변하라고 콘스탄스에서 개최되는 회의에 소환되었다. 338 독일 황제는 그에게 안전 통행권을 주었으며 그가 콘스탄스에 도착하자 법왕은 친히 그에게 어떤 불공정한 일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하였다.

후스는 진리를 옹호하여 장시간 심문을 받은 끝에 그가 주장하는 교리를 취소하든지 혹은 죽음을 택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는 순교자의 길을 택하였다. 자기의 서적이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을 본 후에 자기 자신도 화형을 당했다. 교회와 국가의 고위층 앞에서 하나님의 종은 법왕권의 부패에 대하여 엄숙하고 충실하게 항의하였다. 가장 엄숙하고 공공연하게 안전을 보장하겠다던 그 약속을 뻔뻔스럽게도 저버리고 후스를 처형한 것은 온 세상에 로마교회의 표리 부동한 잔인성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진리의 원수들은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실제로는 그들이 무익하게도 파멸시키려고 애쓰던 사업을 도와주는 격이 되었다.

핍박의 불길 속에서도 널리 성행하고 있는 종교적 신앙의 부패에 대한 조용하고 헌신적이고 간절하고 참을성 있는 항의는 위클리프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사도 시대의 신자들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세상 재물을 자원하여 바쳤다.

법왕권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려고 분투 노력하였으나 법왕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공언하면서도 생애가 너무도 부패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였다. 인쇄기의 발명으로 성경이 더 널리 배포되어 많은 사람들이 로마교회의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한 증인이 자기가 가진 진리의 횃불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때에 다른 증인이 그의 손에서 떨어진 봉화를 다시 받아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봉화를 높이 쳐들었다. 개인과 교회와 국가를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339 백년이란 기간을 건너서 사람들은 위클리프 시대의 롤라드교도의 손을 붙잡고자 저희의 손을 내밀었다. 루터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 칼빈은 불란서에서, 츠빙글리는 스위스에서 복음을 전했다. 세상은 여러 세기의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 때에 이 나라 저 나라에서는 “종교 자유”라는 신비한 단어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