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로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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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천연계와 계시(啓示-성경을 의미함)는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생명과 지혜와 기쁨의 근원이시다. 천연계의 기이하고 미묘한 것들을 보라. 그리고 그것들이 인류뿐 아니라 모든 생물의 필요와 행복에 얼마나 적당한가를 생각하여 보라. 온 땅을 비추는 일광과 적시는 우로(雨露), 산과 바다와 들, 이 모든 것은 조물주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과연 모든 피조물의 날마다의 필요를 공급하여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시인의 글 가운데 이런 아름다운 구절이 있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시 145:15, 16).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매우 거룩하고 행복스럽게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땅이 조물주의 손으로 창조되었을 당초에는 쇠퇴의 증상(症狀)이나 저주의 음영(陰影)이 도무지 없었다. 그렇던 것이 비애와 사망이 이 세상에 이르게 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사랑의 율법-을 범한 까닭이다. 그러나 비록 죄의 결과로 생기는 고통 중에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 있다.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땅은 너(사람)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창 3:17)다고 하였다. 가시덤불과 엉겅퀴-사람의 생애를 괴롭게 하고 근심케 하는 고난과 시련-도 죄가 빚어낸 영락(零落)과 퇴폐(頹廢)에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필요한 훈련의 한 부분으로서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이 세상이 비록 타락하기는 하였으나 모두가 슬픔과 비애 뿐은 아니다. 천연 그 자체 가운데서 희망과 위안의 기별을 찾을 수 있다. 엉겅퀴에도 꽃이 피고 가시덩굴에도 장미꽃이 덮인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는 문구는 방싯방싯 피는 꽃봉오리마다 뾰족뾰족 돋아나는 풀싹마다 기록되었다. 11 공중을 즐거운 노래로 충만케 하는 아름다운 새들, 향기를 풍기는 연연하고 고운 꽃들, 잎이 청청하게 무성한 수풀의 교목(喬木)들, 이 모든 것은 우리 하나님의 인정 있고 자부적(慈父的)인 권고(眷顧)와 그 자녀를 행복하게 하시려는 갈망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품성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을 반포하셨다.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하고 기도하였을 때에 주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출 33:19)리라고 하셨다. 이 선한 형상은 곧 주의 영광이다. 주께서 모세의 앞을 지나시며 반포하시기를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출 34:6, 7) 하셨다. 그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욘 4:2), 이는 그가 “인애를 기뻐하심”(미 7:18)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과 땅에 있는 무수한 증거로써 당신에게 붙들어 매셨다. 천연계의 사물을 통하여 또는 사람이 그 마음으로 체험해 알 수 있는 그윽하고 부드러운 인간적 결연(結緣)을 통하여 그는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그의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충분치 못하였다. 이러한 모든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善)의 대적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포심으로 대하게 되고 또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하지 않는 분이라 여기게 되었다. 사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그 주요 특성이 엄혹하게 처단하시는 자-엄격한 법관이나 각박하고 인색한 고리 대금업자-와 같이 생각하게 한다. 또한 사단은 조물주는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을 찾아내 저들에게 벌을 주려고 질투하는 눈으로 항상 주목하는 분인 것처럼 보여준다. 예수께서 인류 가운데 사시려고 오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심으로 이렇게 몽매한 오해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늘에서 강림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 14:8) 하고 요청하였을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하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실 당신의 사명을 말씀하시기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케 하려 하심이라”(눅 4:18)고 하였나니 이것이 그의 사업이었다. 12 그는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고 사단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쳐 주셨다. 병자의 신음 소리가 아무 집에서도 들리지 않는 촌락들도 있었나니 이는 예수께서 그 가운데로 지나시며 그들의 병을 고쳐주신 까닭이었다. 그의 사업은 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증거가 되었다. 사랑, 자비, 긍휼은 그의 생애의 온갖 행동에 나타났나니 그의 마음은 인류에게 부드러운 동정을 나타냈다. 그는 사람의 소원을 풀어 주시기 위하여 인성을 쓰셨다. 아무리 가련하고 비천한 자라도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작은 아이들이라도 그를 잘 따랐다. 저들은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서 인자하시고 사려(思慮)깊은 그 얼굴을 쳐다보기를 좋아했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라도 숨기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 크신 지혜를 가지고 주의 깊고 친절한 태도로 하셨다. 무례하지 아니하시고 가혹한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감정이 예민한 사람들을 쓸데없이 상심케 하지 아니하셨다. 그는 사람들의 약점을 비난하지도 아니하셨다. 그는 진리를 말씀하시되 항상 사랑으로 하셨다. 그는 외식과 불신과 불의를 단연히 견책하셨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심한 견책을 하실 때마다 그의 말씀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사랑하시는 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나니 이 성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를 거절하였다. 저들은 구주이신 그를 배척하였지만 그는 저들을 불쌍하게 여기셨다. 그의 생애는 극기적이고 남을 생각하여 돌보시는 생애였다. 각 영혼은 그가 보시기에는 귀여웠다. 그는 몸을 언제나 위엄 있게 가지셨으나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각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셨다. 그는 모든 사람이 타락한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사명의 대상자임을 아셨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그의 품성은 이러하였나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품성이다. 13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신령한 긍휼의 흐름은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서부터 흘러내려 인류에게 미친 것이다. 자애로우시고 긍휼하신 구주 예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난”(딤전 3:16)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사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기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간고를 많이 겪은 자”가 되셨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무한히 영광스러운 세계로부터 죄로 인하여 손상되고 쇠퇴되고 사망과 저주의 음영(陰影)으로 어두워진 세계로 내려오심을 용납하셨다. 그는 당신의 아들이 사랑의 품과 천사의 존숭(尊崇)을 떠나서 수치와 능욕과 압제와 증오와 사망을 당하는 일을 허락하셨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보라! 광야의 예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십자가상의 예수를!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의 짐을 몸소 지셨다. 하나님과 일체이신 그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두려운 간격을 그의 마음 가운데 절실히 느끼셨다. 이것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는 고민의 부르짖음을 그의 입술에서 나오게 한 것이다. 죄의 무거운 짐, 죄의 무서운 흉악성과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됨을 느끼는 그것이 하나님 아들의 심장을 터지게 하였다.

그러나 이 큰 희생을 한 것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 사람에게 대한 사랑을 일으켰거나 또는 아버지로 하여금 구원하시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 것이 아니다. 14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요 3:16)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이러한 큰 속죄를 인함이 아니니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이러한 속죄를 준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신 사랑을 타락한 세상에 부어 주시는 일에 매개자가 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후 5:19)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겟세마네의 고민과 갈바리의 죽음으로 무한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신 자께서 우리의 구속의 값을 치르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고 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이러하다. “나의 아버지께서 너희를 심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희를 구속하기 위하여 생명을 버린 나를 더욱 사랑하신다. 내가 내 생명을 드려 너희의 빚[負債]과 죄를 담당하여 너희의 대리자와 보증인이 됨으로 나는 아버지께 귀여움을 받나니 이는 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기가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도 의롭다 할 수 있음이다.”

하나님의 아들밖에는 아무도 우리의 구속을 완성시킬 수 없나니 이는 아버지의 품에 있는 자만이 능히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음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는 자라야 그것을 드러낼 수 있다.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무한한 희생이 아니고는 잃어버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것이 없는 것이다.

1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주신 것은 다만 인류 가운데 사시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인류의 희생제물을 죽게 하신 것만이 아니다. 그는 그 아들을 타락한 인류에게 아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 이익이 되는 것과 필요한 것들을 당신의 것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일체이셨던 그는 도무지 끊을 수 없는 줄로 그 자신을 인류에 붙들어 매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히 2:11)신다. 그는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인성을 쓰신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요 우리의 중보자시요 우리의 맏형님 이시요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당신의 구속하신 인류와 일체가 되신 인자이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류를 멸망과 죄의 타락에서 건져내시고 또한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시켜 거룩한 기쁨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갚으신 대가 곧 그 아들을 주사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신 하늘 아버지의 희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의 고상한 관념을 우리로 가지게 하는 것이다. 성신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은 멸망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보았을 때에 찬탄과 존경의 마음이 충만하여 이 사랑의 위대함과 그윽함을 표현할 적당한 언사를 찾지 못하여 세상을 향하여 “보라”고 부르짖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이것은 사람을 얼마나 가치 있게 보심인가! 범죄로 말미암아서는 인류가 사단의 백성이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심으로 인생을 고상하게 하셨다. 타락한 인류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연합함으로 과연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을 얻기에 합당한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하늘나라 왕의 자녀! 귀한 허락! 이는 가장 깊이 명상할 제목이다. 17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케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을 십자가에 비추어서 연구할수록 그의 자비와 온유와 공평과 의로 섞인 사유(赦宥)를 깨닫게 되는 것이요 또한 그의 무한하신 사랑의 무수한 증거와 자기의 불순종하는 자녀에 대한 자모의 애정보다도 뛰어난, 인정 깊은 자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