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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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의 치료

282 그리스도께 도움을 얻고자 온 많은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질병을 자청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고쳐주기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분에게서 나온 능력이 그 사람들에게 들어갈 때, 그들은 죄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적 질병은 물론이요 영적 질병도 고침을 받았다.

그와 같은 사람들 중에 가버나움의 중풍병자가 있었다. 문둥병자와 마찬가지로, 그 중풍병자는 회복에 대한 모든 소망을 잃어버렸다. 그의 질병은 그의 죄악적 생애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그는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바리새인들과 의사들에게 호소하였으나, 모든 일이 허사였다. 그들은 그의 병이 불치의 것이라고 선언하고, 그를 죄인이라고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중풍병자는 절망 가운데 빠졌다. 그 때에 그는 예수님의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처럼 죄가 많고 속절없는 다른 사람들도 고침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그가 구주께로 운반되어 갈 수만 있다면 자기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질병의 원인을 생각하자 희망은 사라졌다. 그럴지라도 그는 치료에 대한 소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의 큰 소원은 죄의 짐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뵈옵고 용서의 보증과 하늘의 화평을 얻고자 갈망하였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만족히 여길 것이었다.

잃어버릴 시간이 없었다. 그의 쇠약해진 육신에는 이미 죽음의 징조가 나타났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기를 침대에 누인 채로 예수님께 운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283 그러자 그들은 기꺼이 그 일을 해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구주께서 계신 집안과 주위에는 너무 많은 군중이 빽빽이 모여 있어서 그 환자와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가기는커녕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범위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도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들의 관례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주위에 가까이 앉아 있었고, 또한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눅 5:17)도 앉아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소하기 위해 정탐꾼으로 온 자들이었다. 그들 외에도 혼잡한 군중, 열성 있는 자들, 호기심을 가진 자들, 믿지 않는 자들이 모여 있었다. 상이한 민족들과 사회의 모든 계급들이 대표되어 있었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생명의 영께서 회중들 위에 덮여 있었으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분의 임재를 식별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부족감을 느끼지 못하였으므로 고침을 받는 일이 저희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 1:53).

중풍병자를 운반하는 사람들은 군중을 뚫고 들어가려고 거듭거듭 시도해 보았으나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 병자는 말할 수 없는 고민으로 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처럼 갈망하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이처럼 가까이 와 있는데, 어떻게 그 희망을 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의 요청으로 친구들은 그를 지붕으로 운반하여 지붕을 뚫고 예수님 발 아래 그를 내려놓았다.

설교는 중단되었다. 구주께서는 슬픔에 잠긴 그 얼굴을 바라보시고 당신을 주목하고 있는 애원하는 눈을 보셨다. 그분께서는 무거운 짐에 눌려 있는 그 영혼의 갈망을 잘 아셨다. 그 중풍병자가 아직 집에 있을 때 그의 양심을 각성시켜 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셨다. 그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완전하게 고쳐주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을 때, 구주의 자비는 그의 심령에 복을 주셨다. 284 최초의 희미한 믿음의 빛이 자라나서 예수님께서 죄인을 도와줄 유일의 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을 그분께서는 주시하셨다. 그리고 그 믿음이 당신 앞에 나아오고자 하는 온갖 노력과 함께 더욱 강하게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보셨다.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을 당신께로 이끄신 분은 그리스도이셨다. 이제 구주께서는 그 병자의 귀에 음악과 같이 들리는 음성으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고 말씀하셨다.

죄의 짐이 그 병자의 심령에서 떠나간다. 그는 의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보여준다. 누가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부인할 것인가? 희망이 절망을 대신하고, 즐거움이 우울한 심정을 대신한다. 육체적 고통은 사라지고 온몸은 변화된다. 그는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고 평화로운 침묵 속에 누워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행복하다.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그 이상한 사건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초청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죄 때문에 심령이 병들지 않았던가? 그들은 그 짐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군중들에게 자기들의 영향력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한 나머지, 마음속으로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시선이 그들과 마주치자 그들은 그 시선을 피하여 움츠렸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분께서는 중풍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마 9:4-6).

그러자 들것에 실려서 예수님께 왔던 그 사람은 젊음의 탄력과 힘을 가지고 자기 발로 일어섰다. 287 그가 즉시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막 2:12).

그 썩어가는 육체에 건강을 회복시키는 데는 바로 창조의 능력이 요구되었다. 땅의 흙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바로 그 음성이 죽어가는 중풍병자에게 생명이 회복되도록 말씀하셨다. 그리고 육체에 생명을 주신 바로 그 능력이 마음을 새롭게 하였다. 창조 시에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시 33:9) 서게 하신 분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에게 생명을 말씀하셨다. 육체의 치료는 마음을 새롭게 해준 능력의 증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명령하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중풍병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과 육체가 모두 치료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육체의 건강을 누리기 전에 심령의 건강이 필요했다. 육체의 질병을 고침받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해방을 주고, 심령을 죄에서 정결케 하셔야 한다. 이 교훈을 간과하지 말 것이다. 오늘날 육체적 질병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들은 이 중풍병자와 같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기별을 듣고자 갈망하고 있다. 불안하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수반한 죄의 짐이 그들의 질병의 기초가 된다. 그들은 심령을 고쳐주시는 분 앞에 나아오기 전에는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한다. 오직 그분께서 주실 수 있는 화평만이 심령에 활력을 주고 육체에 건강을 줄 것이다.

중풍병자의 치료가 사람들에게 끼친 결과는 마치 하늘이 열려 더욱 좋은 세상의 영광이 주어진 것과 같은 것이었다.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이 발을 옮길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짐을 마치 새의 깃털인 양 가볍게 지고서 군중을 뚫고 지나갈 때, 사람들은 물러서면서 그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288 그들은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그 사람을 응시하며, 저희들끼리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눅 5:26)고 가만히 속삭였다.

불과 얼마 전에 가족들 앞에서 천천히 운반되어 갔던 그 사람이 침상을 가뿐히 가지고 돌아오자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의 집에는 큰 기쁨이 생겼다.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주위에 모였으나 그들의 눈을 거의 의심할 정도였다. 그 사람은 성인의 완전한 활기를 간직하고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팔들이 그의 마음대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오그라들고 우중충한 색깔을 띠고 있던 살은 이제 발랄하고 혈색이 좋아졌다. 그는 든든하고 자유롭게 걸었다. 그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에 기쁨과 소망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순결과 화평의 표정이 죄와 고통의 흔적들을 대신하였다. 그 집에서는 기쁨에 넘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으며, 하나님께서는 소망이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고통받는 자에게 힘을 주신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다.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생애를 예수님께 바칠 준비가 이루어졌다. 조그마한 의심도 그들의 믿음을 흐리게 하지 않았고, 조그마한 불신도 어두웠던 그들의 가정에 빛을 비추어 주신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깨뜨리지 못하였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 103편 1-14절

289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요 5:2, 3).

이 못의 물은 때때로 움직였다. 그런데 이 물이 움직이는 일은 초자연적 능력의 결과이므로, 누구든지 물이 움직인 후에 제일 먼저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고침을 받는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다. 수백 명의 병자들이 그곳을 방문했으나 물이 움직일 때에는 무리가 너무 많아서 남자, 여자, 아이들, 할 것 없이 저들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발로 짓밟으면서 서로 앞을 다퉈 밀려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 못 가까이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 못 가까이까지 간 많은 사람들도 그 못 둑에서 죽었다. 그곳에는 오두막이 세워져서 환자들이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날마다 병에서 놓여나겠다는 헛된 소망을 안고 연못가에까지 기어와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명상과 기도를 하시는 등 홀로 거니시다가 그 못까지 오셨다. 그분께서는 비참한 환자들이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유일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시기를 살펴보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치유력을 발휘하셔서, 고통 당하는 모든 자들을 건강하게 해주시고자 열망하셨다. 그러나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290 무리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치료 행위가 유대인들의 편견을 일으켜 당신의 사업을 단축시킬 것을 아셨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가장 비참한 한 사람의 형편을 보셨다. 그것은 38년 동안 속절없는 앉은뱅이로 지내온 한 사람의 경우였다. 그의 질병은 대체로 그 사람 자신의 악습의 결과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친구도 없이 홀로, 하나님의 자비에서 끊어졌다고 생각하며 오랫동안의 불행한 세월을 지내왔다. 물이 움직일 것으로 생각되는 때가 되면 그의 절망적인 형편을 동정한 사람들이 그를 행각까지 운반해 주곤 하였다. 그러나 혜택을 입을 절호의 기회가 되면 그를 물 속으로 들어가도록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지만 못가에서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 사람보다 더 강한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먼저 뛰어 들어가곤 하였다. 가련하고 속절없는 그 환자는 이기적으로 날뛰는 무리들과 성공적으로 겨룰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끈덕진 그의 노력과 근심, 거듭되는 실망 때문에 그에게 남아 있는 힘까지 빨리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병자는 자리에 누워서 간혹 그 못을 바라보려고 머리를 들어보곤 하였다. 바로 그 때에 친절하고 인자한 얼굴을 한 한 분이 그를 굽어보면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말하므로 그는 그분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의 마음 속에 희망이 솟았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타오르던 용기는 곧 시들어 버렸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자주 그 못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던가 하고 회상하였다. 그는 지금 물이 다시 움직일 때까지 살아 있을 가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기진 맥진한 얼굴로 바라보면서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말한다.

291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6-8절)고 명령하신다.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그 병자는 예수님을 바라본다. 그분의 얼굴 표정과 그분의 음성은 어떤 사람과도 같지 않다. 사랑과 능력이 그분이 계신 곳에서 풍겨오는 것 같다. 그 앉은뱅이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든다. 그는 의심 없이 순종하고자 뜻을 정한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자, 그의 온몸이 반응을 나타낸다.

모든 신경과 근육이 새로운 생명으로 약동하고, 불구가 되었던 그의 사지는 건강하게 움직인다. 그 사람은 제 발로 일어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다시 찾은 힘을 기뻐하면서 든든하고 거리낌 없는 발걸음으로 걸어간다.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아무런 보증을 주지 않으셨다. 그 사람은 “주님, 만일 당신이 나를 고쳐 주신다면, 나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 사람은 의심을 품음으로써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유일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자기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믿었다. 그는 즉시 노력을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힘을 주셨다. 그가 걸어가고자 작정하자 걷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움직일 때, 그는 낫게 되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다. 우리의 심령은 마비되어 있다. 그 쇠약한 사람이 걸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저들의 속절없는 상태를 깨닫고 그들을 하나님과 조화되게 해줄 영적 생명을 갈급하며 그것을 얻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그들은 절망을 안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부르짖는다. 그처럼 절망 가운데서 애쓰고 있는 사람들은 위를 쳐다보아야 한다. 구주께서는 당신의 피로 산 사람들을 굽어보시며, 말할 수 없는 친절과 긍휼로써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그대에게 건전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일어서라고 명령하신다. 그대가 완전히 나았다고 느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292 구주의 말씀을 믿어라. 그대의 의지를 그리스도 편에 두라. 그분을 섬기고자 뜻을 세우고 그분의 말씀대로 행동할 때 그대는 힘을 얻을 것이다. 오랫동안의 방종으로 영과 육을 속박하고 있는 악습과 정욕의 지배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서 능히 건져주실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 주시고자 갈망하신다. 그분께서는 “죄로 죽었던”(엡 2:1) 영혼에게 생명을 나누어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약점과 불행과 죄의 사슬에 매여 있는 포로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다.

죄책감은 생명의 샘에 독을 넣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그대의 죄를 제거해 주겠다. 내가 그대에게 평안을 주겠다. 나는 나의 피로써 그대를 샀다. 그대는 나의 것이다. 나의 은혜가 그대의 약한 의지를 강하게 해줄 것이다. 나는 그대의 죄책감을 제거해 줄 것이다.”

유혹이 그대를 엄습할 때, 근심과 걱정이 그대를 둘러쌀 때, 좌절당하고 낙심되어 절망 상태에 빠지고자 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리하면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어두움이 그분께서 임재하시는 밝은 빛에 의하여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죄가 그대의 심령을 지배하려고 싸우고 양심을 무겁게 할 때, 구주를 바라보라. 그분의 은혜는 죄를 정복하기에 넉넉하다. 불안으로 떨릴 때, 감사한 마음으로 그분께 돌아가라. 그대 앞에 놓여있는 소망을 굳게 붙잡으라. 그리스도께서는 그대를 당신의 가족으로 입적시키고자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의 능력은 그대의 연약함을 도와줄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대를 한 걸음씩 인도하실 것이다. 그대의 손으로 그분의 손을 잡으라. 그리하여 그분께서 그대를 인도하게 하라.

그리스도께서 멀리 떠나 계시다고 결코 생각하지 말라. 그분께서는 언제나 가까이 계신다. 사랑스러운 그분께서는 그대 주위에 계신다. 그분께서 그대에게 발견되기를 바라시는 분으로 알고 그분을 찾아라. 그분께서는 그대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지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교통을 통하여 당신과 동행하기를 바라신다.

장막절은 이제 막 끝났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과 랍비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한 그들의 계책에 있어서 실패하였다. 293 그리하여 밤이 되자,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요 7:53, 8:1).

도시의 흥분과 혼잡, 열렬한 군중들과 반역적인 랍비들을 피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만 함께 계실 수 있는 조용한 감람산으로 가셨다. 그러나 이른 아침에 그분께서는 성전으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그분의 주위에 백성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그분께서는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분께서는 얼마 후에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셨다. 한 무리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공포에 질린 어떤 여자를 끌고와서, 거칠고 열띤 음성으로 그 여자가 일곱째 계명을 범하였다고 고소하였다. 그들은 그 여자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 외관상으로 존경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말하였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4, 5).

그들의 가장된 존경에는 그분을 죽이기 위하여 교묘하게 짜놓은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신다면 그분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다는 비난을 받으실 것이었다. 만일 그분께서 그 여자를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선언하신다면 그분께서는 로마인들에게만 속해 있는 권리를 빼앗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로마인들에게 고소를 당할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장면, 곧 수치심에 사로잡혀 떨고 있는 희생자와 인간적인 동정조차 없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고관들을 보셨다. 흠없이 순결한 그분의 정신은 그 광경 앞에 전율하였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질문을 들은 척도 않으시고 몸을 굽혀 땅을 보시며 땅 위에 글을 쓰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지체와 외관상 무관심에 초조해진 고소자들은 가까이 접근해 와서 그분의 주의를 그 문제에 집중시키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예수님의 시선을 따라 땅 위로 쏠렸을 때, 그들의 음성은 조용해졌다. 294 그들 앞에 그려져 있는 것은 저희 자신들의 생애에 숨겨져 있는 죄의 비밀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드시고 음모를 꾸민 장로들을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그리고 몸을 굽혀 계속해서 글을 쓰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모세의 율법도 깨뜨리지 않고 로마의 권위도 침해하지 않으셨다. 고발자들은 패배 당하였다. 이제 거룩함을 가장하던 그들의 옷은 벗겨져 나가고, 그들은 무한히 순결하신 분 앞에서 정죄를 받고 서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애의 숨은 죄악이 무리들 앞에 공개되지나 않을까 두려워 떨면서 머리를 숙이고 시선을 떨어뜨린 채 저들의 희생자와 그를 동정하는 구주를 남겨두고 도망쳐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그 여자를 보고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0, 11).

그 여자는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 앞에 서 있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 여자에게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그 여자는 감히 눈을 들어 구주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기다렸다. 그는 자기를 고발하던 자들이 부끄러워 하면서 말없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런데 이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희망의 말이 그의 귀에 들려왔다. 그의 마음은 녹아졌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감사한 마음으로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쓰라린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

이것은 그 여자에게 있어서 순결과 평화의 생애, 하나님께 헌신한 새 생애의 시작이 되었다. 이 타락한 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지독한 육체적 질병을 고치시는 것보다 더 큰 이적을 행하셨다. 297 그분께서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영적 질병을 고치셨다. 이 회개한 여인은 예수님을 가장 신실하게 따르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자아 희생적 사랑과 헌신으로 그 여자는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신 은혜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었다. 잘못을 범한 이 여자에 대하여 세상은 다만 멸시와 조롱만을 했지만, 그 여자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신 죄 없는 그분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그 여자에게 뻗으셨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은 정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환경을 아신다. 죄인의 죄가 크면 클수록 그에게는 구주가 더욱 필요하다. 거룩한 사랑과 긍휼로 이루어진 그분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가장 속절없이 원수의 올무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로 끌려간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로써 인류의 해방 문서에 조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귀한 값을 지불하고 사신 사람들이 원수의 유혹의 놀림거리가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정복당하여 멸망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사자굴에서 사자들의 입에 자갈을 물리시고, 불꽃 가운데서 당신의 충성된 증인들과 함께 거니셨던 그분께서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성 가운데 있는 모든 악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오늘날 그분께서는 은혜의 제단 앞에 서서 당신의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리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울며 통곡하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사유와 회복을 위하여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값없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께서 나타내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 그러나 떨고 있는 모든 영혼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명령하신다.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그분과 화평할 수 있다. 그리하면 그분께서 화평하게 해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피난처를 찾아 당신께 돌아온 사람들을 그들을 비난하는 자들과 구설의 다툼 위에 높이 올리신다. 어떤 사람이나 악한 천사라도 그와 같은 사람들을 송사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당신 자신의 신성과 인성에 연합시켜 주신다. 298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빛 가운데서 죄를 지시는 위대하신 분 곁에 서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준다(요일 1:7 참조).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 34).

그리스도께서는 바람과 물결, 귀신들린 자들을 완전히 지배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폭풍을 잔잔케 하고 흉용한 바다를 고요하게 하신 그분께서는 사단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억눌림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을 말씀하셨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에 사로잡힌 자들을 자유케 하시는 당신의 사명을 말씀하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한 공포에 질린 비명으로 방해를 받으셨다. 미친 사람 하나가 사람들 사이에서 달려나오며 소리질렀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꾸짖으시며,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눅 4:35).

그 사람의 고통의 원인 역시 그 자신의 생애에 있었다. 그는 죄의 쾌락에 매혹되어 인생을 하나의 큰 오락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부절제와 천박한 생활이 그의 성격에서 고상한 특성들을 망가뜨려 버렸으므로 사단이 완전히 그를 지배해 버렸다. 후회는 너무 늦게 찾아왔다. 그는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재물과 향락을 희생할 용의가 있었지만 그는 이미 악한 자의 손아귀에서 속절없이 되어 있었다.

299 구주의 면전에 나타나자 그 사람은 자유를 얻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귀신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저항하였다. 그 사람이 예수님에게 도와 달라고 호소하고자 했을 때 악한 영이 그의 입에 말을 넣어주었으므로 그는 공포의 괴로움 가운데서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귀신들린 사람은 자기를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분 앞에 나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 위대한 손을 붙잡을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가고자 애를 쓰자 또 하나의 다른 의지가 그를 붙들었으며, 그를 통하여 다른 말이 나오게 되었다.

사단의 능력과, 자유를 얻고자 한 그 사람의 욕망 사이에 전개된 투쟁은 무서웠다. 고통을 당한 그 사람은 자신의 인간성을 파멸시킨 그 원수와의 투쟁에서 생명을 잃어버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구주께서 권세를 가지고 말씀하시자 사로잡혔던 그 사람은 해방되었다. 귀신들렸었던 그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침착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그 사람은 그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기쁜 음성으로 찬양하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 광증으로 빛나던 눈이 이제는 지성으로 빛나고, 감사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말문을 열게 되자 그들은 피차에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막 1:27)라고 외쳤다.

오늘날에도 가버나움의 귀신들린 사람처럼 정말로 악한 영의 권세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계명에서 고의적으로 떠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사단의 지배에 맡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악습과 친근해 지고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미혹 당함으로 그는 자기의 의지보다 더 강한 의지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자아를 마침내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그 신비한 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은밀한 죄와 강력한 정욕은 그를 마치 가버나움의 귀신들린 사람처럼 속절없는 포로로 만들 것이다.

300 그럴지라도 그의 상태는 절망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동의 없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신이 어떤 능력으로 지배를 받을 것인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아무리 타락하고 아무리 부도덕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귀신들린 사람은 기도 대신에 다만 사단의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있는 말없는 호소는 주님께 알려졌다. 영혼이 필요를 느끼고 외치는 소리는, 그것이 비록 말로 표현되지 않을지라도 무시당하는 일이 없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단의 능력이나 자신의 본성의 연약한 상태 그대로 방치되지 않는다.

“용사의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마는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사 49:24, 25).

믿음으로 구주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변화는 실로 놀라운 것이다.

열 두 사도들처럼 그리스도께서 그 후에 파견한 70인의 제자들도 그들의 사명의 표로서 초자연적 능력의 선물을 받았다. 그들이 사업을 마치고 기쁨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7, 18)고 대답하셨다.

그 때부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사단을 정복당한 원수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들을 위하여 승리를 얻으실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이 그 승리를 자기들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고 말씀하셨다.

301 전능하신 성령의 능력은 모든 회개한 영혼의 방비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와 믿음으로 당신의 보호를 간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사단의 세력 아래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사단이 강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악한 자를 하늘에서 내어쫓으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 계심을 감사하자. 사단은 우리가 그의 힘을 과장하여 나타낼 때 기뻐한다. 왜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가? 왜 그분의 능력과 사랑을 자랑하지 않는가?

하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언약의 무지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한 말씀에 대한 영원한 증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과 더불어 투쟁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을 우주에 증거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존속하는 한 우리에게 능력과 보호를 약속해 주는 보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