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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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성의 모든 충만으로, 또한 당신의 흠없는 인성의 모든 영광으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완전하고 값없는 희생 제물로 주셨다. 그러므로 그분께로 가까이 나가는 모든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값을 지불하신 분처럼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은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자들은 불멸의 몸으로 일어날 것이고, 범죄한 자들은 죽음, 곧 저들이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형벌을 받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성화이다. 이 문제에 대해 마음 속에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하게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덧붙이셨다. 마치 순종이 계속적인 것처럼 성화는 순간적인 것이 아니고 점진적인 과업이다. 사단이 우리를 계속적으로 유혹하고 있는 한, 자아 정복을 위한 전쟁은 계속해서 치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순종을 통하여 진리가 영혼을 거룩하게 할 것이다. 진리에 충성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변화는 모든 생활 환경에 의해 꼴지워지게 된 성품의 모든 약점들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사단의 미혹과 함정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성화되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약한 자의 미혹의 함정이다. 86 죄악으로 빠뜨리는 위험이 끊임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셨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약점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자기를 신뢰하고 무모하게 위험에 노출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힘의 근원이 되시는 우리의 의 예수님을 찾을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한정된 약점들을 절망적으로 느끼면서 회개와 뉘우침으로 나아가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가 주인이 사용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동안 우리는 진리를 대적하는 입장에서 발견되지 않고 의를 위해 언제나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굳게 붙들어야 하고,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의 관습과 전통을 따라서는 안 된다.

오류들이 생겨나 성경의 진리처럼 가르쳐질 때, 그리스도와 연결된 자들은 목사가 말하는 바를 신뢰하지 않고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들처럼 그것이 그러한가 알기 위하여 성경을 매일 상고할 것이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면 그들은 진리의 편에 설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길이니 너희는 그리로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는 참 목자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성경을 그대의 고문으로 삼도록 교육받게 될 것이며, 낯선 자의 음성은 듣지도 따르지도 않게 될 것이다.

두 교훈

영혼이 순결해지고 고상해져서 하늘 왕국에 적합해지려면 반드시 배워야 할 두 교훈, 곧 자기 희생과 극기의 두 교훈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 중요한 교훈들을 훨씬 쉽게 배운다. 그들은 주님께서 온유와 사랑으로 그들에게 주시는 단순한 훈육으로 연마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정결케 하는 불이 그들의 마음에서 교만과 자기 신뢰, 세속적인 정욕과 이기심을 정하게 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승리자가 되고 진정한 품성의 순금을 드러내기 위하여 느린 고난의 훈육을 요구한다.

87 하나님의 사랑은 영혼을 강하게 할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하여 유혹과 시련의 불꽃 가운데서도 상하지 않고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혜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는 우리의 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도움도 효력을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참된 성화는 단지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과 규례에 흠없이 따르는 것이다. 성화는 감정이 아니고 모든 정욕과 욕망을 하나님의 영의 지배 아래 두게 하는 하늘에서 온 원칙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우리 구주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거짓 성화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그것을 주장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높이고 영광스럽게 하도록 이끈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즐거움이든 슬픔이든지 간에 그 일이 그리스도를 반사하지 않고 그 일의 근원으로서 그분을 가리키지 않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아가 보이지 않게 묻어버리지 않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아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은혜가 심령 속에 심겨지면, 그의 소유자는 마음이 겸손해지며 하늘의 사물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자들과의 교제를 구하게 될 것이다. 그때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이며, 받는 자들에게가 아니라 그것을 주시는 분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평화를 소유한다면, 그대의 입술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넘치게 될 것이다. 그때는 그대의 기도와 의무의 이행과 자비와 극기가 그대들의 생각과 대화의 주제가 되지 않고 그대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대를 위해 자신을 주신 그분을 존귀하게 할 것이다. 그대는, “나는 내 자신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나는 모세가 율법에서, 그리고 선지자들이 기록한 말씀 속에서 그분을 발견하였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대가 그분을 찬양할 때, 그대는 귀중한 축복을 얻게 될 것이며, 그대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에게로 돌려질 것이다.

떠들썩하거나 제멋대로가 아님

88 그리스도의 평화는 큰 소리와 육체적인 동작으로 이루어지는 떠들썩하고 제멋대로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지성적인 평화이므로 그것을 소유한 자들에게 광신과 방종한 언행의 특징을 지니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산만한 충동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감화력이다.

구주께서 심령 속에 그분의 평화를 넣어 주실 때,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될 것이다. 성령과 말씀은 일치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람들을 다루시는 모든 과정에서 당신의 말씀을 높이신다. 그것은 그분 자신의 뜻이며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그분 자신의 음성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 이외에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알려줄 어떤 새로운 뜻과 새로운 진리가 없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한 지시와 일치되지 않는 어떤 놀라운 경험을 갖게 된다면, 그대는 그것을 의심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근원이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성경이 나타내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온다.

만일 행복이 하나님의 근원으로부터가 아니라 바깥의 근원으로부터 온다면, 변하는 환경처럼 변할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화는 변하지 않고 영구적인 평화이다. 그것은 어떤 생활 환경이나 세상의 물질의 양이나 세상 친구들의 수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생수의 샘이시므로 그분에게서 나오는 행복과 평화는 결코 쇠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생명의 샘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융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 46:1-4).

아담이 불순종으로 잃어버린 하늘나라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다시 찾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끊임없는 감사를 드릴 이유가 있다. 아담이 범죄하였으므로 그의 후손들은 그의 범죄와 그 결과를 함께 나누게 된다. 89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담의 죄를 담당하셨으므로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게로 피하는 아담의 모든 자손들은 범죄의 형벌에서 피할 수가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아담이 견디는 데 실패한 시험을 견디어냄으로써 인간을 위해 하늘나라를 다시 찾으셨다. 그분께서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셨으므로, 구속의 계획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범하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저들은 율법을 범하는 일을 그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이루어지게 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인간을 신뢰해서는 안됨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능력 안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권능 안에 세워져야 한다. 비록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위대하고 훌륭한 일을 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을 신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힘과 피난처가 되셔야 한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도 그들의 확고한 정신이 흔들릴 수 있으며, 가장 좋은 종교일지라도 그것이 타락할 때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향을 미치는 데서 언제나 가장 위험하다. 순수한 참 종교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순종하는 데서 발견된다. 의는 인류를 고상하게 하지만, 의의 부재(不在)는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킨다.

믿음, 오직 믿음으로

오늘날의 설교단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믿으라, 오직 믿기만 하라, 그리스도를 믿으라, 더 이상 낡은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 이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천명한 사도의 말과 얼마나 다른가. 그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고 말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순결하게 하는 그런 믿음을 소유하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피상적인 믿음으로 생활의 정직성을 대신하고자 노력하고 이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님께서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할 것을 지금도 요구하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의 결함도 없고 오점도 없는 의를 소유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위해 돌아가게 하고자 당신의 아들을 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을 폐지하기 위하여 돌아가시지 않으셨다. 90 갈바리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은 율법의 불변성을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그 형벌을 범죄한 인간을 대신하여 느끼셨고, 죄인은 그분의 공로를 통하여 그분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그분의 흠없는 품성의 미덕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죄인은 거룩한 그의 구속주의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두 번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갈바리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표상적인 희생 제사와 의문(儀文)의 제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이며 그분의 품성의 사본인 하나님의 불변의 율법까지도 폐지했다고 사단이 그리스도교계에 펼쳐 놓은 사상을 영원히 유죄로 판결한다.

사단은 모든 가능한 책략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무효화시키고 그분의 속죄가 무용해지고 그분의 사명이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자 애써 왔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율법을 순종하는 일을 필요없게 만들었고, 죄인이 자기의 죄를 포기하지 않고도 거룩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구약의 표준이 복음 안에서 낮아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죄악 가운데서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분의 사명을 이렇게 말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모든 회개하는 영혼들에게는 기별이 주어져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