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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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봉사자 바울

64 복음 사업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갈릴리 제자들의 믿음과 경험이 열성적인 한 예루살렘 학자의 지성과 결합되었다. 다소 사람 사울은 이방 도시에서 태어난 로마의 시민이었다. 그는 혈통을 보나 평생 동안 받은 교육, 애국심, 신앙을 보나 완전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도 가장 고명한 학자들 문하에서 교육을 받고,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율법과 관습에 따라 훈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이에 따른 편견이 대단하였다. 그는 청년의 때에 이미 산헤드린의 존경받는 의원이 되었다. 그는 고래의 전통적 신앙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로, 전도가 유망한 사람으로 촉망을 받았다.

유대의 신학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이론을 더 중히 여겼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랍비들 나름대로의 교훈과 해석에 의해 그 힘을 잃게 되었다. 65 세력 부식(扶植), 권세에 대한 욕망, 시기와 배타심, 완미(頑迷)하고 교만한 자부심, 이런 것들이 당시의 교사들을 지배한 주의와 동기였다.

랍비들은 타민족뿐 아니라 동족 앞에서도 자신들의 우월성을 자랑하였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 대하여 격렬한 저항심을 가지고, 국가의 주권을 회복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에 찬 음모와는 대조적인 평화의 기별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증오하고 죽였다. 이 박해 운동에서, 사울은 가장 잔인하고 냉혹한 행동 요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애굽의 군사 학교에서 무력의 법칙을 배운 것이 품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므로, 모세는 이스라엘을 사랑의 법칙으로 지도하기에 적합한 자가 되기 위해 천연계 속에서 하나님과 조용한 교제를 나누면서 40 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바울 역시 이와 똑같은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다메섹 성문 밖에서 바울이 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이상은 그의 생애의 방향을 일변시켰다. 박해자가 제자로, 교사가 학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메섹에서 쓸쓸히 보낸 어두운 며칠이 그에겐 마치 몇 해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기억하고 있던 구약 성경의 말씀은 그의 연구 자료가 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사가 되셨다. 그에게도 고요한 천연계는 학교가 되었다. 그는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성경을 연구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배웠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의 생애를 꼴지어 왔던 편견과 관습에서 벗어나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교훈을 받았다.

그의 후반 생애는 자기 희생과 사랑의 봉사로 일관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헬라 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고후 5:14)라고 하였다.

66 사람으로 교사가 된 자 중에서 가장 위대했던 바울은 중요한 의무뿐만 아니라 사소한 의무까지도 받아들여 수행했다. 그는 정신적인 노동은 물론 육체적인 노동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수공업으로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는 문명이 발달된 도시에서 날마다 복음을 전하는 한편, 천막 만드는 일에도 종사하였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할 때에 그는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행 20:34)였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천부적으로 지력이 뛰어났다. 그는 또 그의 생애를 통해 보기 드문 지혜를 발휘했다. 더없이 깊은 뜻을 담고 있는 원칙들, 당시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도 알지 못한 원칙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드러났으며, 그의 생애에서 예증되었다. 그는 모든 지혜 가운데 가장 큰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심과 통찰력을 소유케 하며 서로 참된 마음으로 교제하게 하고 선량한 본성을 일깨워, 보다 고귀한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바울이 이교도인 루스드라 사람들 앞에서, 모든 은혜의 근원이신 천연계의 하나님을 가리켜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행 14:17) 하신 분이라고 한 말을 주목하라.

빌립보의 감옥에 갇힌 그를 보라. 고통스러운 고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밤의 적막을 깨뜨리며 찬미를 불렀다. 지진으로 옥문이 열렸을 때에도 그는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행 16:28)고 하며 이교도인 간수를 안심시켰다. 과연,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죄수들은 같은 죄수인 바울이 그대로 있자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함께 남아 있었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을 지키던 간수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구원의 길을 찾아, 자기의 온 가족과 함께 박해 아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합류했다.

67 아덴의 아레오바고 회의에서 과학에는 과학으로, 이론에는 이론으로, 철학에는 철학으로 응수하는 바울을 보라.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사랑에서 생기는 기지를 가지고, 사람들이 모르면서 섬기는 소위 “알지 못하는 신”은 바로 여호와이신 것을 지적하고, 그리스 시인의 말을 인용하여 여호와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요 저희들은 그 아들인 것을 설명하였다. 계급 의식이 심하여 사람들의 권리가 전혀 인정되지 않던 당시에,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행 17:26) 하신 것을 밝히면서 인류의 형제애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설명하는 그의 말을 들어 보라. 다시, 그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는 은혜와 인자를 베푸시려는 그분의 뜻이 마치 황금의 실처럼 늘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6, 27).

베스도의 법정에서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아그립바 왕이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라고 말하게 한 당시의 바울의 말을 들어 보라. 그는 그가 묶인 사슬을 가리키면서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 26:29)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바울은 스스로의 말처럼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와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고후 11:26, 27)는 일생을 보냈던 것이다.

68 그는 또한 말하기를,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고전 4:12, 13),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라고 하였다.

그는 봉사하는 중에 기쁨을 찾았다. 그리하여, 고난의 일생을 마치게 될 때에, 자기의 투쟁과 승리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딤후 4:7)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러한 내력들은 매우 유익한 것이다. 이것들은 누구보다도 젊은이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일생 동안 하나님께 봉사하는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하여 모세는 미래의 왕위를 거절했고, 바울은 자기 민족 가운데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내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생애가 일종의 자포자기나 희생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하였을까? 모세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받는 욕을 애굽의 보화보다 더욱 부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에게는 사실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여긴 것이다.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빌 3:7, 8)으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과 군주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궁전에는 사람들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는 죄로 물든 향락이 넘쳤으므로, 모세는 그것 대신에 “장구한 재물과 의”(잠 8:18)를 택하였다. 69 그는 애굽의 위대함에 속박되기보다 하나님의 목적에 그의 일생을 연결시키기로 하였다. 그는 애굽의 법률을 정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세상을 위한 율법을 제정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그릇이 되어, 가정과 사회를 위해서는 안전 장치가 되고 국가를 위해서는 번영의 초석이 되는 원칙들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원칙들은 지금도 세상의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 인류의 모든 훌륭한 법률의 기초로 간주되고 있다.

애굽의 위대함이 티끌로 변하고 그 권세와 문명은 끝이 났지만, 모세의 업적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그가 실천적인 생애를 통해 세운 정의의 원칙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모세의 일생은 “만 사람에 뛰어”(아 5:10)나고, “전체가 사랑스”(아 5:16)러우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힘입어 빛났다. 광야에서 방황할 때도, 변화산에서도, 그리고 하늘의 궁정에서도,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한 그의 일생은, 지상에서는 타인과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늘에서는 영예를 받은 생애였다.

바울 역시 그의 여러 가지 일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임재의 능력을 힘입었다. 그는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하였다.

70 바울은 그가 행한 수고의 보수로 장래의 기쁨을 기대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굴욕을 문제삼지 않으신 것과 같은 기쁨, 곧 자기의 수고의 결실을 내다보는 기쁨이었다. 그는 데살로니가의 신자들에게 이와 같이 편지 하였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 20).

바울의 필생의 사업이 세상에 끼친 결과를 어느 누가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괴로움을 덜어 주고 슬픔을 위로하며, 악을 물리치고, 이기주의와 육욕을 버리고 고상한 생활을 하게 하며, 또 영생에 대한 희망으로 생애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모든 선한 감화 중에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가지고 아시아에서 유럽의 남부 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쏟은 숨은 노고에서 비롯된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복된 감화를 사람들에게 끼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생애인가? 그리고, 이런 평생 사업의 결과를 영원한 나라에서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또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