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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장-선한 사마리아 사람

54장 - 선한 사마리아 사람

497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참 종교는 제도나 신조나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 최대의 선을 베풀고 진정한 선으로 사랑의 행위를 하는 데 있음을 보이셨다.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에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다. 큰 무리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제사장들과 랍비들은 율법사로 하여금 이 질문을 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논쟁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으셨다. 그분은 질문자 자신에게 답변을 요구하셨다. 그분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반문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경시한다고 여전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구원 문제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돌리셨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하였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율법사는 바리새인의 지위와 사업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성경 말씀의 참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연구해 왔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라고 진지하게 물었다. 율법의 요구에 대한 그의 답변에서 그는 많은 예식과 의식에 대한 교훈을 그냥 지나쳤다. 498 율법사는 예식과 의식의 무가치함을 주장했으며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두 가지의 큰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리스도께 칭찬받은 이 대답은 구주를 랍비들보다 유리한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율법의 한 해설자가 말한 것을 승인한 데 대해 그분을 정죄할 수 없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율법을 거룩한 통일체로 나타내셨으며 이 교훈에서 한 계명은 지키면서 다른 계명을 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 그 까닭은, 같은 원칙이 모든 계명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운명은 모든 율법을 순종하는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인간을 공평하게 사랑하는 일은 일상 생애에서 실천해야 할 원칙이다.

율법사는 자신이 범법자임을 깨달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심령의 살피는 말씀을 통하여 죄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깨닫고 있다고 주장한 율법의 의를 실행하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지 않았다. 회개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는 대신에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진리를 인정하는 대신에 계명을 이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이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죄를 뉘우치는 일을 회피하고 백성들의 눈앞에서 자신을 변명하려고 하였다. 구주의 말씀은 그의 질문이 불필요한 것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자기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란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유대인들에게 끝없는 논쟁을 일으켰다. 그들은 이방인과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이 사람들은 외인이요 원수들이었다. 그러나 자국민들과 사회의 상이한 계층 사이에 선을 어떻게 그어야 하는가? 제사장과 랍비와 장로는 누구를 이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생애를 순결하게 하려고 끊임없는 예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무식하고 부주의한 군중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될 터이므로 이것을 그들은 제거하기 위해서는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부정한 자”들을 이웃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인가? 예수께서는 또다시 논쟁 가운데 휩쓸려 들어가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정죄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자들의 편협함을 공공연히 비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단순한 이야기로써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율법사로 하여금 진리를 고백하게 한 천래(天來)의 사랑이 넘쳐흐르는 장면을 청중들에게 묘사하셨다.

어둠을 몰아내는 방법은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류를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자아에 중심을 둔 마음의 결함과 죄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이다.

499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0~32)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것은 상상적인 장면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었으며 표현된 그대로라고 알려지고 있다. 다른 쪽으로 지나쳐 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무리 가운데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여행할 때에 여행자는 유대 광야의 일부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은 거칠고 험한 협곡으로 나 있었으며 이곳에는 강도가 횡행하여 때때로 난폭한 장면이 벌어지곤 하였다. 바로 이곳에서 한 행인이 강도의 습격을 받아 귀중품을 모두 빼앗기고 상처를 입고, 타박상을 입은 채 거의 죽게 되어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행인이 이렇게 쓰러져 있을 때에 한 제사장이 그 길로 왔으나 그는 부상을 입은 그를 그저 흘끗 보고 지나가 버렸다. 그 다음 레위인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한 호기심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통받는 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땅히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차라리 상처 입은 사람을 보지 않도록 그 길로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 일이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성직자였으며 성경 해설자라고 공언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 특별히 택함을 받은 계층에 속했다. 그들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용납하여”(히 5:2) 사람들에게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이해시켜야 할 자들이었다. 500 그들에게 맡겨진 사업은 예수께서 자신의 사업이라고 묘사하신 사업과 같았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업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여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8).

하늘의 천사들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그들을 압박과 고통에서 건져내는 데 사람들과 협력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 제사장과 레위인을 상처를 입고 고통하는 자가 누워있는 길로 인도하여 자비와 도움이 필요한 그를 볼 수 있게 하셨다. 온 하늘은 그들의 마음이 인간의 고통에 동정을 나타낼 것인지 지켜보고 있었다. 구주는 광야에서 히브리 사람들을 교훈하신 분이셨다. 구름기둥과 불기둥가운데서 그분은 지금 백성들이 저희 제사장들과 교사들로부터 받고 있는 것과는 크게 다른 교훈을 가르치셨다. 율법의 자비로운 조항은 그들의 필요와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등 동물들에게까지도 뻗쳤다. 이러한 취지의 지시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주어졌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나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출 23:4, 5). 그러나 강도에게 상한 사람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고통당하고 있는 형제의 경우를 제시하셨다. 그들의 마음은 짐 나르는 짐승보다 그에게 얼마나 더 동정을 쏟아야 했던가!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기별이 주어졌다. 하나님 여호와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신 10:17­19; 레 19:34)고 명하셨다.

욥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고 말했다. 사람으로 변장한 두 천사가 소돔에 왔을 때에 롯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면서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욥 31:32; 창 19:2)라고 말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모든 교훈을 잘 알고 있었으나 실생활에 실천하지 않았다. 민족적 편견이 강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배타적이었다. 그들은 상처 입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가 자국민인지 아닌지 식별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가 아마도 사마리아인일거라고 생각하고 돌아가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묘사하신 그들의 행동 가운데서 율법사는 그가 율법의 요구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아온 것에 배치되는 점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503 그러나 이제 다른 장면이 제시되었다.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 도중에 고통당하는 자가 있는 그 곳에 이르렀다. 그를 보자 동정심이 생겼다. 그는 이 낯선 사람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문제시하지 않았다. 만일 유대인이라면, 그리고 그 상황이 정반대의 경우라면, 그 사람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멸시하면서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사마리아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 때문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지체하면 자신도 폭행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도 생각지 않았다. 도움이 요구되는 고통당하는 한 인간이 그의 앞에 있는 것만이 문제였다. 그는 옷을 벗어서 그를 덮어 주었다. 그가 자신의 여행을 위하여 준비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 입은 사람을 치료하고 원기를 회복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그는 그 사람을 짐승에 태운 다음, 부상당한 사람이 흔들려서 더 고통을 당하지 않게 일정한 보폭으로 천천히 걸었다. 주막으로 데리고 와서 밤을 지새우며 친절히 돌봐 주었다. 아침에 환자가 좀 나은 것을 보고 그 사마리아인은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주막 주인에게 그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그 비용을 지불하고 그를 위하여 돈을 맡겼다. 이것으로도 족하지 않아 그는 더 많은 비용이 들 경우를 대비해서 주인에게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아 주리라”고 약속하였다.

이야기는 끝났다. 예수께서는 율법사의 마음을 읽고 계신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고 물으셨다.

율법사는 심지어 지금도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여 “누가 내 이웃이니이까”라는 질문은 영원한 답을 얻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웃이 단순히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교회나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이셨다. 그것은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계급의 구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다. 적에게 상처받아 죽게 된 영혼은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다. 하나님의 소유인 모든 사람은 다 우리의 이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자신과 자신의 사명을 묘사하셨다. 인류는 사단에게 속임을 당하고 상처를 입고 도둑맞고 파멸되었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우리의 절망적인 상태를 동정하셨다. 504 그분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죽어 가는 우리를 찾아내어 우리의 처지를 떠맡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의의 두루마기로 우리를 덮으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고 자신의 비용으로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준비를 다 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자신의 모본을 지적해 보이면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7, 13:34).

예수님에게 법관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됩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의의 대의임을 알고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마리아인은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의 명령을 이행함으로 자신이 율법을 행하는 자임을 입증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하셨다.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대되고 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이 교훈은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신 당시 못지않게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 이기심과 냉정한 형식주의는 사랑의 불길을 거의 꺼버렸으며 품성을 향기롭게 할 은혜를 쫓아 버렸다. 그분의 이름을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대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가정에서, 이웃 사이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남의 유익을 위하여 실제적으로 자아를 희생하지 않는 한, 우리가 무엇을 공언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관심을 인간의 관심과 연결시키고 우리에게 인간을 구원하는 사업에 당신과 하나가 되라고 요청하신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신다. 모든 악한 것들 중에 가장 큰 것이 죄이지만, 죄인을 동정하고 도와주는 일이 우리가 할 일이다. 과오를 범하고 수치심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격려의 말에 굶주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과 과오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거의 절망 직전까지 내몰린다. 우리는 이런 영혼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도움이 가장 필요되는 바로 그 사람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피하여 다른 길로 지나가 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병으로 인한 것이든 죄로 인한 것이든 곤경에 빠진 인간들을 볼 때 이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결코 말하지 말 것이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갈 6:1) 믿음과 기도로써 원수의 세력을 물리치라. 상처받은 사람에게 치료하는 향유가 될 수 있는 믿음과 용기의 말을 하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큰 투쟁에서 용기를 잃고 낙담해 왔다. 505 그러나 이 때 한마디의 친절한 격려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들은 승리할 힘을 얻었을 것이다. 우리는 고통하는 영혼에게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는 그 위로를 나누어 주려고 노력함 없이 결코 그대로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율법의 원칙 즉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가운데서 예증되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명백하게 나타난 원칙의 성취에 불과하다. 그분의 품성은 율법의 참 의미를 드러내며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준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와 친절과 사랑을 나타낼 때 그들 역시 하늘 법도의 성격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시 19:7) 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이 존중하노라고 공언하는 법을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형제들에게 나타내는 정신이 곧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정신이 어떠한지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유일한 샘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2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