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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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14장 -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132 침례 요한은 이제 요단강 저편 베다니에서 복음을 전하며 침례를 베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과할 때까지 강물의 흐름을 막으셨던 곳이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하늘의 군대에 의하여 허물어진 여리고의 성채가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이때에 되살아나서 침례 요한의 기별을 감명 깊게 하였다. 지난 세대에 그토록 놀라운 일을 행하신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능력을 다시 나타내지 않으시겠는가? 요단강 언덕에 날마다 운집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요한의 복음 선포는 종교계 당국자들의 주목을 끌 만큼 국가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로마인들은 폭동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하여 모든 대중적인 집회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며, 백성들의 폭동을 불러일으킬 조짐이 나타날 때마다 유대 관원들은 두려워하였다. 요한은 산헤드린의 권위를 인정하여 자신의 사업에 대해 산헤드린의 재가를 얻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133 그는 관원들과 백성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똑같이 견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를 열렬하게 따랐다. 요한의 사업에 대한 관심은 끊임없이 증대되어 가는 듯이 보였다. 요한은 산헤드린에 복종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요한이 공중의 교사로서 그들의 관할 아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단체는 제사장과 관원들과 백성의 교사들 가운데서 선택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대제사장이 그 회의 의장이었다. 회원들이 모두 연로하지는 않았지만 나이든 사람들로서 유대의 종교와 역사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지식에도 박식한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흠이 없어야 하였으며 결혼하여 아버지가 된 자로서 다른 사람보다 더욱 인정 있고 사려 깊은 사람이어야 했다. 그들의 회합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에 연결된 한 방이었다. 유대 나라가 독립 국가였을 때 산헤드린은 국가의 최고 법정으로서 사회와 교회에 대한 권위를 겸유하고 있었다. 지금은 비록 로마 총독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산헤드린은 민사(民事)와 종교적인 문제에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산헤드린은 요한의 사업에 대한 조사를 지체할 수 없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은 성전 안에서 사가랴에게 보이신 계시와 아이를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지적하였던 아버지의 예언을 상기시켰다. 격동과 변천의 30년 세월 속에서 이러한 일들은 거의 잊혀졌다. 이러한 사실들이 요한의 전도에 관한 사람들의 소동으로 말미암아 지금 그들의 마음에 떠올랐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없어진 지도 오래되었으며 현재 진행 중에 있는 그러한 개혁을 경험한 지도 오래 되었다. 죄를 자복하라는 요구는 새롭고도 놀랍게 보였다. 지도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은 생애의 은밀한 것들이 폭로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요한의 호소와 책망의 말을 가서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이 전한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직접적인 선포였다. 메시야의 강림을 다루고 있는 다니엘의 70주일(週日)에 관한 예언이 거의 끝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 당시 기대하던 국가적 영광의 시대에 참여하기를 열망하였다. 이와 같이 백성들이 열광적이었으므로 산헤드린은 불원간 요한의 사업을 재가하든지 거절하든지 곧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미 백성들에 대한 그들의 권세는 약해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지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들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으로 그 새로운 선생과 협의할 제사장들과 레위인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요단강에 급파했다.

무리들이 모여서 요한의 말을 듣고 있을 때 대표단이 다가왔다. 134 오만한 랍비들은 사람들을 위압하고 선지자의 존경심을 이끌기 위하여 의도된 권위 있는 태도로 거드름을 피우며 나아왔다. 존경이라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태도로 군중들은 그들이 지나가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호사스러운 옷을 입고 지위와 권세의 자만심에 찬 이 위대한 사람들이 광야의 선지자 앞에 섰다.

그들은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요한은 그들의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무엇이냐, 네가 엘리야냐?” “나는 아니라.” “네가 그 선지자냐?” “아니라.”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요한이 인용한 성경절은 이사야의 아름다운 예언이다. 135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1~5).

옛날에는 왕이 자주 다니지 않는 그의 영토 내의 지역을 여행할 때에는 일단의 사람들을 왕의 수레보다 앞서 보내 험준한 비탈을 평평하게 하고 우묵한 곳을 메우게 함으로 왕이 안전하게, 장애 없이 여행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선지자는 복음 사업을 예증하기 위하여 이 관습을 인용하였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리라. 하나님의 영이 그 각성시키는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지실 때에 인간의 교만심은 낮아진다. 세상의 쾌락과 지위와 권세는 가치가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이론”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은 다 파해지고 모든 생각은 사로잡혀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 10:5) 한다. 사람들 가운데서 그토록 과소평가되던 겸비와 자아 희생적인 사랑은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으로 높여진다. 이것이 바로 복음 사업이요 요한의 기별도 그것의 일부였다.

랍비들은 심문을 계속하였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 “그 선지자”란 모세를 두고 한 말이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지고 데려감을 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가 이미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침례 요한이 공중 전도를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예언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하여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으므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선지자 모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또한 메시야가 강림하시기 전에 엘리야가 직접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요한은 이러한 기대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보다 깊은 뜻이 있었다. 예수께서 후에 요한에 대하여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엘리야가 행한 사업을 하기 위하여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왔다. 만일 유대인들이 그를 받아들였다면 그들을 위하여 그 일은 성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기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요한은 엘리야가 아니었다. 요한은 자기가 성취하기 위하여 왔던 사명을 그들을 위하여 완수할 수 없었다.

136 요단강에 모였던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침례 받으시던 그 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 주어진 표적은 그들 중 몇 사람에게만 나타났다. 침례 요한의 앞선 몇 달 동안의 봉사 기간에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부름에 유의하기를 거절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마음은 강퍅해졌고 이해력은 어두워졌다. 예수께서 침례받으실 때에 하늘이 그분에 대하여 증거하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였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본 적이 없는 눈은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보지 못하였으며,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는 귀는 그 증언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다. 지금도 그와 같다. 그리스도와 섬기는 천사들의 임재가 회중 가운데 나타나는 때가 종종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평상시와 다른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구주의 임재하심이 드러난다. 화평과 기쁨으로 마음은 활기를 얻는다. 그들은 안위와 용기와 축복을 받는다.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대표자들은 요한에게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고 물은 후에 그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를 훑어보던 요한의 눈이 밝게 빛나고, 그 얼굴은 환해졌으며 그의 전신은 깊은 감동에 휩싸였다. 양손을 뻗치면서 그는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요 1:26, 27)고 외쳤다.

산헤드린에 가지고 가서 전달할 그 기별은 명백하고 분명하였다. 요한의 말은 오래 전에 약속된 분 이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없었다. 메시야가 그들 가운데 있다니!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놀라서 요한이 말한 그분을 발견하고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무리 가운데서 그분을 분간해 낼 수 없었다.

예수님의 침례 때 요한이 그분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가리켰을 때 새로운 빛이 메시야의 사업을 환히 비추었다. 요한의 마음은 “그가…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사 53:7)이라는 이사야의 말에 쏠리고 있었다. 그 후 여러 주일 동안 요한은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예언의 말씀과 제사의식의 가르침을 연구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사업의 두 국면, 곧 고난당하시는 희생 제물과 승리하시는 왕으로서의 두 국면을 분명히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분의 강림이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달았다. 137 요한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돌아오셔서 무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보았을 때 그분께서 당신의 본성에 대한 어떤 표징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것을 확신하며 지켜보았다. 그는 구주께서 당신의 사명을 선포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매우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한 마디의 말씀도 없었고 아무런 표징도 주어지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당신에 대한 침례 요한의 선포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제자들과 사귀면서 당신의 특별한 사업에 대한 외적 증거를 주지 않으셨고, 남의 이목을 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오시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자기에게 머무르자 요한은 그의 두 손을 펴면서 이렇게 말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서…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요 1:29~34).

이 사람이 그리스도란 말인가? 사람들은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방금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 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요한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날마다 자신들의 죄를 책망하는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중에 날이 갈수록 그가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침례 요한보다 더 크신 이분은 누구란 말인가? 그분의 의복이나 태도에서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것은 조금도 없었다. 그분은 그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입는 검소한 옷을 입은, 신분이 낮은 인물인 것처럼 보였다.

무리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침례 받으실 때에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이후로 구주의 용모는 크게 변했다. 그리스도께서 침례 받으실 때에 그들은 그분의 용모가 하늘의 빛으로 변화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창백하고 쇠약하고 야위어서 선지자 요한만이 그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분의 얼굴에 거룩한 동정과 뚜렷한 능력이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모든 눈길마다, 얼굴 전체에 겸손과 말할 수 없는 사랑의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138 그분는 영적 감화의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는 듯이 보였다. 그분의 태도는 온순하고 겸손한 반면에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능력을 느끼게 하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분이 바로 이스라엘이 그토록 오랫동안 고대하여 오던 분이신가? 예수께서 가난과 겸비 가운데서 오신 것은 우리의 구속주가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 왕과 같은 화려함을 가지고 오셨더라면 어떻게 겸비를 가르치실 수 있었겠는가? 산상 설교에서처럼 어찌 예리한 진리들을 제시하실 수 있었겠는가? 예수께서 왕으로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면 비천한 자들의 소망은 어디서 찾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무리들에게, 요한이 지적한 그분은 그들의 높은 기대에 부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크게 당황했다.

제사장들과 랍비들이 그토록 듣기를 갈망했던 말, 즉 예수께서 곧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회복시켜 주시리라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 같은 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왕은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 의와 평강의 왕국을 세우시려고 하신 분은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다.

이튿날 두 제자가 곁에 서 있을 때 요한은 다시 예수께서 사람들 가운데 계신 것을 보았다. 선지자의 얼굴은 다시 보이지 않는 분에게서 오는 영광으로 환하여졌다. 이어 그는 이렇게 외쳤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 말은 제자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다. 그들은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데 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칭호는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요한 자신은 그 말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요한을 떠나서 예수를 찾으러 갔다. 둘 중의 하나는 시몬의 형제 안드레였고 다른 하나는 전도자 요한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최초의 제자들이었다. 억누를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이는 그분과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간절히 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과 침묵 속에서 “이분이 메시야인가?”라는 중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를 따르고 있는 것을 아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전도하신 첫 열매들이었으므로 이 사람들이 당신의 은혜의 초청에 응답하였을 때에 거룩한 교사이신 예수님의 마음은 기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보면서 “무엇을 구하느냐”고만 물으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돌아가거나 혹은 자신들의 소원을 이야기하거나 간에 그들의 자유에 맡기고자 하셨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그분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부르짖었다. 길가에서의 잠시 동안의 면담으로는 그들이 바라던 것을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로 만나서 그분의 발아래 앉아 말씀 듣기를 원하였다.

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라.

요한과 안드레가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불신의 정신을 갖고 있었더라면 예수님의 발아래서 배우는 자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비평가로서 그분께 나왔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함으로 가장 귀한 기회의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나 이 첫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례 요한이 전도할 때에 성령의 부르심에 반응하였다. 그들은 이제 하늘 교사의 음성을 알아보았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신선함과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룩한 조명(照明)이 구약성경의 교훈을 비추었다. 진리의 다양한 주제들이 새로운 빛 속에서 솟아올랐다.

영혼으로 하늘에서 오는 지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회개와 믿음과 사랑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지식의 열쇠이며,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안”(요일 4:7)다.

제자 요한은 진실하고, 정이 깊으며, 열정적이었지만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식별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사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아 오던 세상의 부귀와 권세가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요 1:14)이었다. 그는 놀라운 그 주제를 명상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안드레는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 기쁨을 나누어 주려고 하였다. 그는 그의 형제 시몬을 찾으러 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소리쳤다. 시몬은 두 번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 역시 침례 요한의 전도를 들었다. 그는 구주께로 급히 갔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주목해 보고 그의 성품과 생애의 역사를 읽으셨다. 그의 충동적인 성질, 그의 따뜻하고 인정이 많은 마음, 그의 야심과 자만, 그의 타락과 회개와 활동과 순교의 죽음의 역사 등 이 모든 것을 구주께서는 읽으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고 말씀하셨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빌립은 그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 또한 즉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불렀다. 나다나엘은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지적할 때에 무리들 가운데 있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보자 실망하였다. 수고와 빈곤의 흔적을 지닌 이 사람이 과연 메시야일까? 그러나 나다나엘은 예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요한의 기별이 그의 마음에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140 나다나엘은 빌립이 불렀을 당시 조용한 숲 속에 물러가서 요한이 선포한 말과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을 명상하고 있었다. 그는 요한이 선언한 그분이 구주시라면 자기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위하여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빌립은 그의 친구가 예언의 말씀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에 빌립이 그의 은신처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무성한 나뭇잎으로 가려진 이 격리된 장소에서 종종 함께 기도했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는 기별은 나다나엘에게 자기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으로 보였다. 그러나 빌립은 아직까지도 흔들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의심을 품은 말을 덧붙였다. 나다나엘의 마음속에 다시 선입견이 일어났다.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하였다.

빌립은 논쟁하지 않았다. 그는 “와보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다나엘은 놀라서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외쳤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홀로 기도하던 나다나엘에게 증거하였던 하나님의 영이 이제는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그에게 말씀하셨다. 의혹을 가지고 어느 정도 선입견에 빠져 있기는 했지만 나다나엘은 진리를 찾는 정직한 욕구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나왔다. 이제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의 믿음은 자기를 예수께로 인도한 자의 믿음을 능가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이 랍비들의 지도를 신뢰했더라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제자가 된 것은 스스로 보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41 오늘날 선입견을 가지고 선으로부터 물러서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도 그러하다. 만일 그들이 “와 보”면 그 결과는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인간적인 권위의 지도를 신뢰하는 한 아무도 진리의 구원하는 지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다나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연구하고 성령의 깨우쳐 주심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을 보신 분은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고 있는 우리도 보실 것이다. 빛의 세계에서 내려온 천사들은 겸손하게 하늘의 지도를 구하는 자들 가까이에 있다.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는 요한, 안드레, 시몬,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름으로 시작되었다. 요한은 자기 제자 중 두 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 중 하나인 안드레가 그의 형제를 찾아 그를 불러 구주께로 인도하였다. 빌립은 부름을 받자 나다나엘을 찾으러 나갔다. 우리는 이러한 실례에서 우리의 인척과 친구와 이웃에게 직접적인 호소를 하는 개인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배워야 한다.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주께로 이끌기 위하여 개인적인 노력을 해 보지 않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모든 일을 목사에게 맡겨 버린다. 목사는 자기의 부르심을 위해서는 자격을 잘 갖추고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교인들이 행하도록 맡겨 주신 일을 할 수는 없다.

애정 어린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만일 이웃의 남녀 평신도들이 개인적인 노력을 하였더라면 구원받았을 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전도를 받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생활하는 바로 그 가정과 이웃과 도시에서 그리스도의 선교사로서 해야 할 사업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업은 우리의 기쁨이 될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면 즉시로 예수가 자기의 귀중한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남에게 알려 주고 싶은 욕망이 마음속에 생긴다. 구원하며 성화시키는 진리는 마음속에 가두어 놓을 수 없다.

하나님께 헌신한 모든 사람은 빛의 통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은혜의 부요함을 전하게 하신다. 그분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겔 34:26).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고 말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증언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스스로 보도록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제 하늘에 올라가 계시므로 그분의 제자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의 대표자가 된다.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실증하는 것이다. 142 다른 이에게 끼치는 우리의 감화는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사람됨에 더 크게 좌우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논리에 도전하고 반박하고 우리의 호소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심 없는 사랑의 생애는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이다.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으로 특징지어진 언행일치의 생활은 세상에서 한 능력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확신과 경험이 어우러진 말씀의 표현이었으므로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자들은 하늘의 명령을 따르는 교사들이 된다. 말씀을 통하여 성화된 사람 자신이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능력 즉 말씀이 청중들의 마음에 매력적인 것이 되게 하고 그들에게 말씀이 살아있는 실재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능력을 갖고 있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며 받아들일 때에 그는 이것을 그의 태도와 어조에서 설득력 있게 드러낼 것이다. 그는 자신이 듣고, 보고, 만져보았던 생명의 말씀을 알게 하여 다른 이들로 그리스도의 지식을 통하여 그분과 교제하도록 할 것이다. 제단에서 취한 핀 숯이 닿은 입술에서 나오는 증언은 잘 받아들이는 마음에 진리가 되어 품성을 성화시킨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빛을 주려고 하는 사람 자신이 축복을 받을 것이다. “복된 장맛비를 내리리라”,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 없이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계발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사업을 분담해야 한다. 그분의 기쁨, 곧 그분의 희생을 통하여 구속받은 영혼들을 보는 기쁨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들의 구속을 위한 그분의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

그처럼 충만하고 열렬하며 진실한 나다나엘의 첫 신앙 표현은 예수의 귀에 음악과 같이 울렸다. 그래서 그분은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고 하셨다. 구주께서는 온유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사단의 포로가 된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게 될 당신의 사업을 기쁨으로 바라보셨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신 귀중한 축복들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여기서 그리스도는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요단강 언덕에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에게 내려왔다. 그 광경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일한 표적이었다. 만일 너희가 나를 그렇게 믿는다면 너희의 믿음은 각성될 것이다. 너희는 장차 하늘이 열리되 결코 닫히지 않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43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을 열어 놓았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궁핍한 자와 애통하는 자들의 기도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지고 올라가고 인간 자녀들에게 축복과 소망, 용기, 도움과 생명을 가지고 내려오고 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땅으로 항상 왕래하고 있다. 곤고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적은 천사들의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 하늘의 사자들의 봉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갖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이르러 온다. 우리 구주께서는 친히 인성을 취하심으로 당신의 관심을 타락한 아담의 아들 딸들의 관심과 연합시키시는 한편, 당신의 신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붙잡고 계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사람과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통의 중개자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