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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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유대인들 사이에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라는 질문은 끝없는 논쟁을 일으켰다. 그들은 이방 사람들과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외인이요 원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희 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구별하며 여러 같지 않은 계급의 사람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제사장들과 랍비들과 장로들은 누구들을 이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들은 저희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의식으로 한 평생을 보냈다. 그들은 무식하고 부주의한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면 더러워지게 되며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이 “깨끗지 아니한 자”들을 이웃으로 여겨야 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이 문제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써 대답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이 우리가 속한 교회의 교인이나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계급적 차별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의 이웃은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우리의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이웃은 역경으로 말미암아 매를 맞고 상함을 받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소유물인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다.

377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한 율법사가 그리스도께 질문을 던짐으로 베풀어진 것이다. 구주께서 가르치실 때에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 가운데서 그를 책잡을 만한 것을 찾으려고 율법사로 하여금 그러한 질문을 하게 하고 그분께서 하시는 대답을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변론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히려 질문하는 사람들에게서 그 대답을 끌어내셨다. 그분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물으셨다. 그 때까지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비난했었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구원 문제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여부에 달렸다고 말씀하셨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고 대답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사는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행실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성경의 참뜻을 알고자 하는 진정한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연구해 왔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은 흥미를 가지고, 진정한 마음으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질문했다.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었느냐고 하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의식적 율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의문의 율법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다만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의 기초가 되는 두 큰 원칙을 제시했다. 주님께서 그의 대답을 칭찬하심으로 랍비들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셨다. 왜냐 하면 예수께서 율법의 해석자가 주장한 것을 시인하심으로 랍비들이 그분을 비난할 수 없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교훈을 통해서 율법을 언제나 거룩한 통일체로 제시하셨으며 모든 율법이 한 가지 원칙 위에 세워져 있으므로 어느 한 가지 계명은 지키고 다른 계명은 범해도 된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 378 사람의 운명은 그가 온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자기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율법사가 더욱 분명하고 더욱 비판적인 연구를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가 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율법사는 자기가 처음에 네 계명뿐 아니라 마지막의 여섯 가지 계명도 다 지키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날카로운 말씀을 듣고 깨우침을 받았으나 그는 그의 죄를 고백하는 대신에 그것을 핑계하려 했다. 그는 진리를 인정하는 대신에 오히려 계명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379 그렇게 함으로 그는 죄에 대한 자각을 묵살시키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려 했던 것이다. 구주의 말씀은 그의 질문이 쓸데없는 것이었음을 보여 주셨는데 이는 그가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 대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또다시 그리스도께서는 논쟁에 휘말리기를 원치 아니하셨다. 그분은 청중들의 마음에 기억을 새롭게 하는 한 가지 사건을 말씀하심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하셨다. 그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고 이야기 하셨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사람들은 유대 광야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길은 황무지를 지나 바위들이 많은 산골짜기로 나 있었다. 그 길에는 때때로 강도가 출몰했으며 난폭한 사건이 벌어지곤 했다. 이야기 가운데 한 사람이 습격을 받아 귀중품을 빼앗기고 거의 죽게 된 채로 길가에 쓰러져 있던 곳은 바로 그러한 곳이었다. 그가 그렇게 쓰려져 있을 때에 한 사람의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얻어맞아 많은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그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아니하고 떠나가 버렸다. 그는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다음에는 한 레위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하는 호기심에서 발을 멈추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 그는 자기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알았으나 그 일은 자기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차라리 그리로 오지 않았더라면 상처 입은 그 사람을 보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후회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일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자위하면서 그 역시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 같은 길로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했던 그 일을 몸소 행했다. 그는 정중하고 친절하게 상처 입은 그 사람을 돌봐 주었다. 그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하였다. 380 제사장과 레위인은 둘 다 깊은 신앙을 가졌다고 자처했으나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참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나타내 보였다. 그 일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처럼 사마리아인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정신과 행실에 있어서 그 자신이 하나님과 일치되어 있었음을 증거해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교훈을 주실 때에 직접적이고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율법의 원칙을 제시해 주신 동시에 그 청중들에게 저희가 이 원칙들을 실행하는 일에 태만히 하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너무나 분명하고 예리했으므로 청중들은 책잡을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율법사는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서 한마디도 책잡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에 대해 가졌던 그의 편견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민족적 편견에서 탈피하지 못했으므로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씀으로 그들에게 명예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에게 그와 똑같은 부드러운 친절로 대하라. 그렇게 함으로 그대가 온 율법을 지킨다는 증거를 보여 주게 될 것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차이로 참된 예배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였다. 바리새인들은 사마리아인에 대해 좋게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지독한 저주를 퍼부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증오심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것을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다. 그 사마리아 여자가 “당신은 유대인으로써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라고 말했다. 381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그리고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해 죽이고 싶은 증오심으로 가득 차서 일어나 성전에서 그분을 돌로 치려 했을 때에 그들이 말한”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요 8:34)는 말보다 더 적절하게 그들의 증오심을 나타낼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일을 등한히 하고 저희가 미워하고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저희 나라 백성을 돌보도록 버려두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자기를 업신여기는 사람들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 보였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입은 사람을 자기 형제처럼 대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382 우리의 구주께서는 인간의 사랑이 필적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우리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을 때에 그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분은 우리를 피해 지나가지 않으셨으며 우리로 속절없이, 아무 소망도 없이 죽도록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온 하늘 천군의 존경을 받으시던 거룩하고 행복한 하늘 집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상처를 보시고 이를 고치시려고 인류의 상징을 당신 자신의 일처럼 돌아보셨다. 그분은 당신의 원수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다. 그분은 당신을 죽인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모본을 가르키시며 제자들에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요 15:17),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말씀하셨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성전 예배에 참석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너무나 크고 고상한 특권이었으므로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저희가 그렇게 높임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길가의 봉변당한 사람을 돌봐 준다면 저희의 위신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저희는 저희 동포들에게 축복을 나누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이 특별한 기회를 등한히 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전혀 다른 두 종류로 구별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규정된 커다란 일들이고, 다른 하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나타나 있지 않은 소위 작은 일들이다. 이러한 범위에 속하는 일들은 사람의 변덕스러움에 맡겨져서 충동과 기분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품성은 훼손되고 그리스도교는 오해를 받게 된다.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저희의 위엄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성전이 황폐된 사람들을 냉담하고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어떤 이들은 이와 다른 동기로써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는다. 저희는 그리스도의 사업을 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보다 가치 있는 어떤 사업을 하려고 애쓴다. 383 저희가 매우 훌륭한 사업을 하고 있으므로 궁핍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돌볼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소위 위대한 사업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심지어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것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 고통스럽고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만들고, 그들의 권리를 빼앗으며, 그들의 필요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행위가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 형제나 이웃 사람들이 역경 속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홀로 투쟁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고 있기 때문에 제 삼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도 그들처럼 냉혹한 이기심을 가진 분으로 생각하도록 한다. 주님의 종들이 그분과 협력하지 않기 때문에 저희에게서 흘러나와야 할 하나님의 사랑이 저희 동포들에게 흘러가지 못하고 그들에게서 차단된다. 인간의 마음과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찬양과 감사의 노래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빼앗기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영혼들과 당신의 나라에 데려 가 당신과 같이 영원토록 살게 되기를 열망하시는 영혼들을 빼앗기고 계신다.

거룩한 진리가 우리의 실천을 통하여 많은 감화를 끼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 세상에 별 감화를 끼치지 못하고 있다. 신앙을 공언하는 일이 허다하게 많지만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나 있는 모든 진리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으나, 우리의 믿음을 일상 생애에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의 이웃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고백이 비록 하늘처럼 높다 해도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고 우리의 동포들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올바른 모본이 우리의 신앙 고백보다 훨씬 많은 유익을 세상에 끼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업은 결코 이기적 행위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업은 압박받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업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자들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부드러운 동정심 곧 그분이 당신의 생명을 버려 구원하실 만큼 귀하게 여기셨던 자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 384 이러한 영혼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어떤 예물보다도 무한히 귀중한 것이다. 궁핍한 자를 돌아보지 않고 낯선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면서 외형적으로 위대한 사업에 온갖 정력을 기울이는 일은 하나님께서 시인하시는 봉사가 아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심령의 성화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사람 속에 심는 것이다. 복음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활 속에 거하시는 것이며 곧 살아 움직이는 원칙을 말한다. 이 신앙은 품성 속에 나타나 선한 일을 하도록 해주는 그리스도의 덕성인 것이다. 복음의 원칙들은 실생활의 어떤 부문과도 분리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경험과 활동은 그분의 생애를 대표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은 경건의 기초이다. 사람이 말로는 아무리 공언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형제들에 대해 이기심 없는 사랑을 갖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순진한 사랑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러한 정신을 가질 수 없다.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한다. 자아가 그리스도께 몰입될 때에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완성은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계속해서 일어날 때 곧 하늘의 햇빛이 마음에 충만하고 얼굴에 나타날 때에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마음에는 사랑의 결핍이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접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주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면 우리는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도 사랑의 금고리로 연결될 것이다. 385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긍휼과 동정심이 우리의 생애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궁핍한 자들과 불행한 자들이 우리를 찾아오기까지 기다리지 말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해 달라는 간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던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궁핍한 자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사랑과 동정을 베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다른 삶을 복되게 하고 향상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곳마다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이교국(異敎國) 안에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종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푼 예가 있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증거한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덕성을 야만인의 마음속에 넣어 줌으로 저희의 본성과 교육에 반대되는 동정심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요 1:9)은 그들의 심령에 비치고 있다. 이 빛에 유의한다면 그 빛은 그의 발길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것이다.

386 타락한 자들을 향상시키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것은 하늘의 기쁨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의 마음속에 거하든지 간에 그는 그분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어디서 활동하든지 간에 복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사업을 행하는 곳마다 거기에는 광명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국적이나, 인종이나 계급의 어떠함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창조주이시다. 이 창조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한 가족이 되고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모든 분리의 장벽을 헐어 버리고, 모든 성소의 칸막이를 열어 젖히셔서 모든 사람이 자유로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사랑은 너무도 넓고, 너무도 깊고, 너무도 충만해 있기 때문에 어디든지 뚫고 들어간다. 이러한 사랑은 사단의 기만으로 미혹된 불쌍한 영혼들을 그의 세력의 범위에서 끌어낸다. 이 사랑은 저희로 하여금 약속의 무지개에 둘려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의 구별이 없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가까워졌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3:28; 에베소서 2:13).

종파의 신조에 어떠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고통 중에 부르짖는 인류의 호소는 들어주어야 하고 또 그 부르짖음에 응답해야 한다. 종파가 다르기 때문에 감정이 좋지 않을 때에는 개인적 봉사를 통해 좋은 결과를 많이 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봉사는 편견을 타파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미리 예상해야 한다. 우리는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를 막론하고 그들의 기쁨과 염려에 동참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주위에는 동정의 말과 도움의 손길이 요구되는 가련한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다. 동정과 도움이 요구되는 과부들이 있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위탁하신 자로 받아들이라고 명하신 고아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을 등한히 여기고 간과(看過)해 버리는 일이 너무나 많다. 비록 저들은 초라해 보이고, 무뚝뚝하고, 무례히 행하고, 그들의 일거일동에 아무런 매력이 없을지라도 그들 역시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387 그들은 주님께서 값으로 산 자들이며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귀중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가족의 일원(一員)임으로 그분의 청지기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저들의 영혼을”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죄는 모든 사악한 것 가운데 가장 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같은 방법으로 접근할 수 없다. 세상에는 심령의 기갈을 숨기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친절하게 말해 주고 친절하게 생각해 줌으로써 그들을 많이 도와줄 수 있다. 이 밖에도 많은 도움이 요구되는 자들이 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저 무서운 심령의 결핍을 깨닫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너무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영원한 사물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도 잃어버리고 심지어 저희 영혼이 구원받아야 할 필요성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뿐더러 사람도 신임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오직 사욕이 없는 친절한 행위를 통해서 진리로 인도될 수 있다. 저희의 물질적 필요를 먼저 돌봐 주어야 한다. 그들을 먹여 주고, 씻어 주고, 부끄럽지 않게 입혀 주어야 한다. 그들이 그대의 이기심 없는 사랑의 증거들을 보게 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기 쉬워질 것이다.

세상에는 실수를 저지르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그들의 어리석음을 곰곰이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자기들의 실수와 과오만을 생각한 나머지 마침내는 자포 자기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영혼들을 등한히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흐르는 물을 거슬러 헤엄을 치게 되면 물살의 힘이 그 사람을 뒤로 민다. 그러한 때에 우리의 맏형님 되시는 예수님께서 일찍이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당신의 손을 내미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구조의 손길을 내밀자. 그들에게 희망적인 말 곧 그들에게 확신을 주고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해 주라.

정신적으로 병든 그대의 형제들은 마치 그대 자신에게 형제의 사랑이 필요했던 것처럼 그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 형제들은 그들처럼 연약했던 자들의 경험이 필요하며 또 그들을 동정하고 도울 수 있는 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것이 우리로 몹시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우리는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위로를 그들에게 나누어 줌이 없이는 결코 그 사람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388 마음과 뜻과 생각이 정욕을 이길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살아 계신 구주와 개인적으로 접촉해야 한다. 방황하는 자들에게 그들을 붙들어 주시는 전능하신 손과,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인성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라. 그러한 자들이 율법과 권력 곧 동정심이 없고 도움을 구하는 호소를 전혀들어 주지 않는 율법과 권력을 믿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그들은 따뜻한 손을 붙잡을 필요가 있고 자비가 넘치는 가슴에 기댈 필요가 있다. 마음속에 거룩하신 분이 항상 그들의 옆에 계시다는 생각을 간직하게 하고, 항상 애절한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갖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죄를 슬퍼하시는 천부의 마음과 지금도 팔을 펴고 계시는 천부의 손과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사 27:5)고 말씀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음성을 생각하도록 하라.

우리가 이 일에 종사할 때에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동반자들을 갖게 된다. 상해를 입은 사람을 보살펴 준 사마리아 사람의 곁에는 하늘의 천사들이 모여 있었다. 하늘 조정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자기 동료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곁에 서 있다. 그뿐 아니라 그대는 친히 그리스도 자신의 협력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는 회복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감독 하에서 일한다면 커다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일에 충실히 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원한 운명도 결정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친구가 되기까지 향상될 모든 사람들을 향상시키고자 하신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곤란과 재난을 겪도록 허락하신다. 그분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품성의 특질 곧 동정과 긍휼과 사랑이 계발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이러한 봉사의 일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늘 조정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게 되고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것이다. 389 우리가 이러한 봉사의 일을 거절한다면 그의 교훈을 거절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과 영원히 결별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주께서는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선 천사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슥 3:7)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늘 천사들과 협력하여 일하는 것은 하늘에서 그들과 교제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는 것이다.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히 1:14) 을 받은 하늘의 천사들은 이 세상에서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마 20:28)는 자들을 환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복된 교제를 통하여 한없는 기쁨으로써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라는 질문 가운데 포함된 모든 분명치 않은 점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