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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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그리스도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은 저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은혜의 기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각 사람에게 제공된다. 그러나 사람이 만일 자기만족을 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헛되이 보내게 되면 저희는 스스로 저희 자신을 영생에서 끊어 버리는 것이 된다. 죽은 후에 유예 기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저희는 저희 자신의 선택으로 저희와 하나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를 만든다.

이 비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부자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난한 자를 대비하여 묘사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계급의 사람들의 처지가 뒤집어질 때가 오고 있음을 보여 주신다. 비록 세상에서는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고난을 참는 자들은 장차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지위를 가졌으나 하나님께 저희 생애를 바치지 아니한 자들보다 높임을 받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 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들로 배 불리려 하매”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261 이 부자는 하나님과 사람을 공공연하게 무시한 불의한 법관으로 대표된 부류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자였다. 그는 거지를 난폭하게 대우하지도 않았고, 보기 싫다고 해서 그를 저리로 가라고 쫓아 버리지도 않았다. 가련하고 보기 싫은 거지가 문에 앉았다가 들어오는 자기를 보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그는 그 거지가 거기 있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고난 중에 있는 그 형제의 궁핍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그 당시에는 병자를 치료하는 병원이 없었다. 병자와 가난한 자들이 당신께서 재물을 맡겨 주신 사람들의 도움과 동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께서는 그들을 그들의 눈에 띄는 곳에 있게 하였다. 이 비유의 거지와 부자도 이와 같은 환경 가운데 있었다. 나사로는 도움이 크게 필요 되었다. 그는 친구도 없고,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같이 이러한 처지에 있도록 내버려진 반면에 그 부한 귀인은 부족한 것이 없이 호화롭게 살았다. 자기 동포들의 곤란한 사정을 넉넉히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오늘날에도 이 부자처럼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있다.

오늘날에도 바로 우리 주위에는 굶주리고 헐벗고 집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궁핍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재물을 나눠 주기를 등한히 함으로 우리가 장차 당면하기를 두려워할 그런 죄과(罪過)의 짐이 우리에게 가중되고 있다. 모든 탐심은 우상을 숭배한 죄로 선고된다. 모든 이기적 방종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

하나님께서 부자를 당신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 삼았으므로 거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부자의 의무이다. 다음과 같은 명령이 주어졌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262 부자는 유대인이었으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맡은 재물과 재능에 대해 회계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주의 축복이 그에게 풍성히 임했으나 그는 그 축복으로 자기의 창조주를 높이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에 사용하였다. 그는 축복을 받은 만큼 인류의 향상을 위하여 그 선물을 사용할 의무가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건만 부자는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생각지 않았다. 이 부자는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빌려 주신것에 대해서는 이자를 내지 않았다. 그는 지식과 재능을 가졌으나 그것을 잘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잊어버리고 그의 모든 능력을 오락을 추구하는 데 써 버렸다. 그를 두르고 있는 모든 것과 날마다 계속되는 오락과 친구들의 칭찬과 아첨은 그가 이기적 향락에 몰두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친구를 사귀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자비를 베푸는 주님의 봉사 사업에 그분과 협력해야 할 책임감을 잊어버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교훈을 실행할 기회를 가졌으나 그가 선택한 쾌락을 사랑하는 모임이 그의 시간을 빼앗아 감으로 인하여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때가 지나서 이 두 사람의 형편이 바뀔 시간이 이르러 왔다. 가난한 자는 날마다 고생을 당하고 있었으나 그는 그 모든 것을 참을성 있게 또 조용히 참아 왔다. 얼마 후에 그는 죽어 장사되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온갖 고난을 참으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거하였고 자기의 믿음에 대한 시험을 잘 견디어냈다. 그리하여 그가 죽었을 때에 천사의 부축을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나사로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고생당하는 가난한 사람을 대표한다. 나팔 소리가 나고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나올 때에 그들은 상급을 받게 될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이 이론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이었기 때문이다.

263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입장에 서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죽는 날로부터 부활할 때까지 의식(意識)을 갖고 있다는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 속에 많이 섞여 있었다. 구주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잘 아시고 그 중요한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이 비유를 그들의 선입주견에 따라 구성하셨다. 그분은 청중들이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참된 관계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의 거울을 내거셨다. 그분은 자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알리고 싶어 하신 사상 즉 사람이 소유한 모든 것은 주께서 그에게 빌려주신 것이므로 그분의 소유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를 재물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는 사상을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떠돌던 이야기를 이용하셨다. 이러한 재물의 선물을 잘못 사용함으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가장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자신을 두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 다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청중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하셨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저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으로써 사람이 2차의 유예기간을 바라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설명하셨다. 현세에서만 사람에게 영생을 위하여 준비할 기회가 주어진다.

부자는 자기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으므로 고통 가운데서도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264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라고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에게 기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브라함을 하나님보다 높였고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의지하였다. 십자가 상의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라고 그리스도께 기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즉시 다음과 같은 대답이 이르러 왔다. 내가 오늘(굴욕과 고난의 십자가에 달려 있는 지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그러나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기도했으나 그 기도는 응답되지 못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으니 그분만이 실지로 높임을 받아야 할 분이다.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5:31, 4:12).

부자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에 그의 일생을 허비했으며 너무 늦게서야 자기 자신이 영생을 위해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한편 자기가 살아온 것처럼 자기 자신만을 기쁘게 하는 생애를 살고 있는 자기 형제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간청하였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그 부자가 자기 형제들에게 믿을 만한 좀더 큰 증거를 보여 달라고 간청했을 때에 그는 비록 그런 증거를 보인다 할지라도 그들이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대답을 들었다. 그의 간청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비난이 섞여 있었다. 이 간청은 부자가 마치 만일 당신이 나를 좀더 철저히 경고해 주셨더라면 지금 내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 요청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러한 뜻이었다. 너희 형제들도 충분히 경고를 받았다. 265 빛을 그들에게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보려 하지 않았다. 진리를 그들에게 소개해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였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유대인의 역사를 보아 우리는 이 말씀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이적이면서도 가장 큰 이적은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다. 유대인들은 구주의 신성에 대한 이러한 매우 놀라운 증거를 보았으나 저희는 그것을 배척하였다. 나사로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나 그들에게 그 사실을 증거했으나 그들은 이 모든 증거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나사로를 죽이려고까지 했다(요 12:9~11).

율법과 선지자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매개자 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하는 것에 유의하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저희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증인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유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빛보다 더 큰 빛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빛을 거절하고 자기에게 제공된 기회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기별을 가지고 온다할지라도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같은 증거를 보고도 수긍하려 하지 않을 것인데 이는 율법과 선지자를 거절한 자들은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져서 어떠한 빛도 거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부자와의 사이에 교환한 말은 비유적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공과는 각 사람에게는 저희가 해야 할 의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빛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책임은 각자에게 주어진 기회와 특권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충분한 빛과 은혜를 주셔서 그로 하여금 당신께서 맡기신 일을 할 수 있게 하신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의무를 보여 주는 작은 빛을 따라 행하지 않을 것 같으면 더 큰 빛은 그에게 주어진 축복을 이용하는 일에 불성실하고 태만했다는 것을 나타내 줄 뿐이다. 266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모세와 선지자로 말미암아 오는 빛을 거절하면서 어떤 놀라운 이적을 구하는 자들은 비록 그들의 요구가 수락된다할지라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그 두 사람으로 표상된 두 계급의 사람들이 내세에서는 어떻게 평가될지를 보여준다. 부정한 수단으로 재물을 얻지 않았다면 부자가 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재물이 많기 때문에 부자가 정죄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에게 맡겨진 재물을 이기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정죄함을 받는다. 사람이 그의 재물을 선을 행하는 데 사용함으로 그의 재물을 하나님의 보좌 옆에 쌓을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처럼 영원한 부를 얻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은 사망이 그를 가난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을 위하여 재물을 쌓는 사람은 그 중의 아무것도 천국으로 가져갈 수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이 불충실한 청지기임을 실증했다. 그는 한평생 재물을 풍부히 가지고 살아왔으나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의무를 등한히 했다. 그는 하늘의 보물을 얻는 일에 실패했다.

그처럼 많은 특권을 가졌던 부자는 자기의 재능을 개발해서 그의 사업이 멀리까지 미치게 하여 영적 유익을 끼쳐야 할 사람을 대표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죄를 도말해 버릴 뿐 아니라 죄로 인하여 줄어 든 가능성과 잃어버린 영적 선물을 다시 사람에게 회복시켜 주려는 것이 구속의 목적이다. 재물을 내세로 가져갈 수 없다. 거기에는 재물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행한 선한 행위는 하늘 조정으로 가지고 갈 수 있다. 궁핍한 동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주님께 받은 선물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사람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창조주께 욕을 돌리는 자이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죄가 하늘 책에 있는 저희의 이름 아래 기록된다.

267 부자는 돈을 가지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가졌지만 하나님께 대한 그의 회계 계정을 바르게 정리할 수 있는 재물은 가지지 못했다. 그는 마치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다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요구와 고통당하는 자들의 요청을 등한히 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 부자가 등한히 할 수 없는 요구를 받게 된다. 그 의문을 제기하거나 대항할 수 없는 권세에 의하여 이제 그는 더 이상 청지기 노릇을 하지 말고 그의 일터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한때 부자였던 그는 절망적인 궁핍에 빠졌다. 하늘의 베틀로 짠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가 결코 그를 가려 줄 수 없다. 한때 홍포와 가장 고운 베옷을 입었던 그 부자는 이제 헐벗게 된다. 그의 구원을 위한 은혜의 기간은 끝나 버렸다. 그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져온 것이 없거니와 또한 이 세상에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휘장을 거두시고 제사장들과 관원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 광경을 보여 주셨다. 이 세상 재물에는 부요하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부요하지 못한 그대들이여, 이 광경을 자세히 보라. 그대들은 이 광경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겠는가. 사람들에게는 매우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가증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물으신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36,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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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시던 당시에 유대 나라에는 주의 재물을 자신을 만족시키는 데 사용함으로 인하여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단 5:27)는 선고를 듣게 될 가련한 부자와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부자는 모든 세속적 축복과 영적 축복을 받은 사람이지만 이 축복을 사용하는 일에 하나님과 협력하기를 거절했다. 유대나라 백성도 꼭 이와 같았다. 주께서는 유대인들을 거룩한 진리의 보관자로 삼으셨다. 그분은 그들을 당신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 정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온갖 영적·물질적 특권을 주시고 이런 축복을 나누어 주라고 명하셨다. 268 그리고 타락한 저희의 동포와, 저희 문 안에 있는 외인과, 저희 가운데 있는 빈곤한 사람들을 취급하는 일에 대하여 그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주셨다. 그들은 저희의 유익을 위해서만 무엇이나 얻으려고 애쓰지 말고 궁핍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사랑과 자비의 행실에 따라 그들에게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부자와 같이, 고난당하는 인류의 물질적·영적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도움의 손을 펴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에는 교만이 가득 차서 저희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으로서 그분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저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고 그분을 경배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만을 의뢰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요 8:33)고 자랑삼아 말했다. 위기를 당했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아브라함을 하나님처럼 의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의 어두워진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시고자 열망하셨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39, 40).

그리스도께서는 혈통에 어떤 공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영적 관계는 모든 육신적 관계를 폐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아브라함의 일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아님을 드러내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함으로서 저희 자신을 영적으로 아브라함과 일치시키는 자들만이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간주된다. 거지는 비록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계급에 속해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아브라함이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269 부자는 비록 인생의 온갖 사치를 누렸으나 너무나 무지하여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아브라함을 두었다. 만일 그가 그 고상한 특권을 감사히 여기고 하나님의 영이 그의 마음을 형성하도록 용납했더라면 그는 현재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표상하는 나라도 역시 그러하다. 그 백성들이 만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했을 것 같으면 저희의 장래는 전혀 다르게 되었을 것이며 그들은 참된 영적 식별력을 가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진 재물을 증가시켜서 온 세상을 축복하고 교화시키는 데 충분하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졌으므로 그들의 전 생애는 그릇된 길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써 진리와 의를 따라 저희가 받은 선물을 사용하지 않았다. 영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저희의 불성실의 결과가 온 백성을 파멸시켰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 당신의 경고를 기억하게 될 것을 아셨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내리고 백성이 기아와 온갖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 비유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빛을 세상에 비추는 일을 등한히 함으로 재해(災害)를 자취했다.

마지막 시대에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장면이 이 부자의 만년(晩年)의 생애 가운데 묘사되어 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으나 실상은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 곧 그릇된 방향으로 개발된 성품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는 떨어져 있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분을 섬겼으나, 부자는 하나님을 생각지 아니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인류의 요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부자와 아브라함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깊은 골짜기는 곧 불순종의 골짜기였다. 270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길로 따라가는 자들이 많이 있다. 비록 그들이 침례 교인이기는 하나 거듭나지 못했다. 그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해서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라고 읊을지라도 저희는 그것이 거짓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가장 극악한 죄인보다 더 의롭지 않다. 세속적 쾌락이 주는 자극을 갈망하는 사람들, 모양을 내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와 같이 육신의 정욕을 대적해서 싸우려는 경향이 없다. 그는 식욕에 방종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죄악적인 분위기를 선택한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사망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의 생전에 사단의 대리자들과 협조함으로 형성된 품성을 그대로 가지고 무덤에 내려간다. 사람이 무덤에서는 선악간에 아무것도 선택할 힘이 없다. 이는 사람이 죽으면 그 도모가 당일에 소멸하기 때문이다(시 146:4; 전 9:5, 6).

하나님의 음성이 죽은 자를 깨우실 때에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있을 때에 가졌던 것과 같은 식욕과 정욕, 좋아하고 싫어하는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무덤에서 나오게 된다. 모든 기회와 편의(便宜)를 제공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재창조함을 받지 못한 자들을 재창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그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기쁨을 찾지도 못했다. 그의 품성은 하나님과 조화되지 못했으므로 그는 하늘 가정에서 즐거워할 수 없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폭식가도 아니며, 술주정꾼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 자신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살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의 생각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므로 저희는 불신자들로 간주된다. 저희가 비록 하나님의 거룩한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생명나무에 나아갈 권세를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각종 제재 조항이 들어 있는 하나님의 계명이 그들에게 제시되었을 때에 저희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271 그들은 현세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내세에서도 그분을 섬기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곳에서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저희는 어떤 곳이라도 하늘나라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그분의 은혜 곧 그분의 품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들에게 제공해 주신 귀한 기회와 거룩한 감화를 감사하게 생각지도 아니하고 그것을 이용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행해질 거룩한 봉사에 참여하기에는 부적당하다. 그들의 품성은 하나님의 품성을 따라 형성되지 못했다. 저희는 저희 자신의 태만으로 말미암아 어떤 것으로도 다리를 놓을 수 없는 넓은 간격을 만들었다. 저희와 의인들 사이에는 몹시 큰 골짜기가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