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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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자와 씨

33 그리스도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천국에 대해 설명하셨을 뿐 아니라 크신 농부로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사업에 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는 밭에서 씨를 뿌리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 그 자체가 곧 씨앗이었으며 그는 이 씨로서 가장 귀중하고 은혜로운 진리들을 심으셨다. 씨 뿌리는 비유는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비유의 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농부가 밭에 뿌리는 씨를 통하여 우리가 복음의 씨, 곧 파종되면 패역한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그 씨를 생각하기 바라신다. 작은 씨의 비유를 말씀하신 그분은 하늘의 임금이시며 밭에 씨를 뿌리는 일을 주관하는 법칙이 진리의 씨를 뿌리는 일도 주관한다.

군중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열심과 기대를 가지고 갈릴리 바닷가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자리에 누워 자기의 병을 예수님께 보이려고 기다리는 병자들도 있었다. 34 죄에 빠진 인류의 고통을 치료하는 일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리였으므로 그는 병을 꾸짖으시고 그의 주위에 생명과 건강과 화평을 뿌리셨다.

군중이 점점 많이 몰려와 그 자리가 입추의 여지도 없이 되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들의 어선을 타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계속하시면서 자기를 태워 바다를 건네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고깃배에 올라타셨다. 그러고는 제자들을 시켜 배를 뭍에서 조금 떨어지게 하신 후 해변에 있는 군중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그 해변 일대에는 아름다운 게네사렛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에는 산들이 솟아 있었고 산비탈과 들에는 농부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씨를 뿌리고 있었으며 다른 이들은 이른 철에 나는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3~8).

그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초림하신 방법 역시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모든 제사 제도의 기초였으며 엄숙한 성전의 봉사는 하나님이 친히 명하신 것이었다. 이 모든 의식과 예전(禮典)은 때가 되면 그 모든 예식이 가리키고 있는 분이 나타나실 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형식과 의식만을 중요시하고 그 의식이 가리키는 근본 목적을 잊어버렸다. 35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의 전설과 격언과 교조(敎條)로써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교훈을 가리워 버렸다. 사람들의 전설과 격언은 참 종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으므로 그들은 모든 의식의 실체(實體)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시고 오셨을 때에 그가 모든 표상적인 의식의 성취요 모든 그림자의 실체가 되심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식의 원형이신 분을 거절하고 그들의 표상적인 의식과 무용지물이 된 예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으나 그들은 계속하여 그분께 표적을 요구하고 있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는 기별에 그들은 기적을 보여 달라는 요구로 회답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된 것은 그들이 구주를 요구하는 대신에 기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시야가 나타나면 그가 대 정복을 감행하여 자신이 메시야라는 주장을 입증하고 폐허된 지상 왕국의 터 위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로써 이러한 기대에 답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이나 폭력적인 수단에 의하여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새로운 원칙을 심어 줌으로써 건설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마 13:37).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가 아니요 씨 뿌리는 자로서 오셨다. 나라를 뒤집어엎으려 하심이 아니요 씨를 뿌리기 위하여 오셨다. 자기를 따르는 자들로 국가의 권력이나 세속적인 승리를 얻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손실과 실망의 경험을 겪고 신고를 맛본 후에 얻어지는 수확을 바라보도록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의 뜻을 깨닫기는 하였으나 그 교훈이 그들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그들은 그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다. 무리들은 이 새 교사가 무슨 목적으로 그토록 신비한 것을 이야기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은 이상하게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고 그들의 야심을 처절하게 실망시켰다. 제자들까지라도 그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저희는 흥미를 가지고 예수님께 조용히 나아와 비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좀 더 명백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먼저 그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이 일어나기를 바라셨다. 36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묻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듯이 그렇게 제자들에게 그 비유를 잘 설명해 주셨다. 성령의 깨우쳐 주심에 마음 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자들에게는 그 말씀의 뜻이 언제까지나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 7:17)고 말씀하셨다. 진리를 더욱 자세히 알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오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천국의 신비들을 그들에게 계시해 주실 것이며, 진리를 알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은 그 신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늘의 빛이 영혼의 성전을 비추일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어두운 길에 밝게 비치는 등불처럼 나타나게 될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마 13:3)간다. 동양에서는 분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폭행을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성안에 살고 있었다. 농부들은 매일 그 성 밖에 나가 일했다. 그와 같이 하늘의 농부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나오셨다. 그는 평화스럽고 안전한 하늘 집과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영광을 버리시고 우주의 보좌를 떠나오셨다. 그는 괴로움과 시험을 받는 한 인간으로써 쓸쓸하게 이 땅에 오셔서 잃어버린 세상을 위하여 눈물로 생명의 씨를 뿌리시고 당신의 피로써 물을 주셨다.

그리스도의 종들도 이와 같은 태도로 씨를 뿌리러 나가야 한다. 아브라함이 진리의 씨를 뿌리는 자가 되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에,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행 22:21)는 기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37 이와 같이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려는 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야 한다. 옛 친구와의 교제도 끊어야 하고 일생의 계획도 포기해야 하며 세상에 붙은 소망도 모두 버려야 한다. 고통과 눈물과 고독 속에 자신을 희생하면서 씨 뿌리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뿌리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인류의 타락이래로 사단은 줄곧 거짓의 씨를 뿌려 왔다. 그는 맨 처음에 거짓으로 인류를 자기 손아귀에 넣었으며 그 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역시 거짓으로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복시키고 사람들을 자기의 권세 아래 굴복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38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신 씨 뿌리는 자로써 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는 하나님과 같이 의논하는 일에 동참하신 분이시며 영원하신 자의 가장 깊은 성소에 거하셨던 분이시므로 사람들에게 순수한 진리의 원칙을 나타내실 수 있으셨다. 인류가 타락한 이후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진리를 계시하시는 자가 되셨다. 그로 말미암아 썩지 않는 씨 곧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벧전 1:23)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려지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약속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씨를 심으셨다. 그러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특별히 인류에 대한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봉사와 그의 사업에 적용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이다. 씨앗마다 그 자체 속에 맹아력(萌芽力)이 있다. 그 씨앗 속에는 그 식물의 생명력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도 생명력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 6:63, 5:24)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그분의 말씀 속에 있는 모든 약속에는 능력 곧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있으므로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명령은 실현되고 모든 약속은 성취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실제로 하나님의 생명과 품성을 받는 것이다.

씨마다 그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다. 씨가 올바른 조건하에 심어지면 곧 발아해서 그 식물 속에 있는 자신의 생명을 자라게 한다. 그와 같이 믿음으로 마음속에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면 반드시 하나님의 품성과 생명이 그 사람의 생애 속에 실현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뿌리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교사로서 하신 일은 그리스도 당시의 랍비들이 한 일과는 아주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은 전설과 인간의 이론과 가설에 구애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그 말씀에 대한 인간의 가르침과 저서에 치중하였다. 39 그러므로 그들의 교훈에는 심령을 소생시키는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과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항상 질문하는 자들을 “기록되었으되”, “성경에 어떻게 말하였느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고 하는 단순한 말로써 대하셨다. 반대자들이나 찬성자들을 막론하고 그들의 관심이 일깨워졌을 때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씀의 씨를 뿌리셨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살아 있는 말씀이 되시는 그분은 성경을 가리켜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리스도의 종들도 바로 그같은 일을 하여야 한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에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요긴한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사람의 학설과 이론을 받아들인다.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성경 전체를 영감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다. 어떤 학자는 한쪽 부분을 부정하고 다른 학자는 다른 부분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들은 자기의 판단과 견해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이고 저희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성경을 가르침으로 성경의 거룩한 권위를 파괴한다. 그리하여 불신의 씨가 널리 뿌려짐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혼란되어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우리가 마음대로 막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될 신조들이 많이 있다. 그리스도 당시에 랍비들은 성경의 많은 부분을 억지로 이상하게 해석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의 단순한 교훈들이 그들의 생활을 질책하였으므로 그들은 그 말씀의 능력을 소멸시키고자 애썼다. 오늘날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행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범법 행위를 변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상하고 모호하게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당시에 있었던 이같은 행위를 책망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다 이해하여야 된다고 그분은 가르치셨다. 그분은 또 성경을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권위 있는 책이라고 지적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마땅히 그렇게 하여야 한다. 성경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논쟁의 해결서로서 그리고 모든 신앙의 기초로서 제시되어야 한다.

40 성경은 이같은 능력을 빼앗겨 버렸고 그 결과로 인류의 영적 생활은 점점 타락하게 되었다. 오늘날 강단에서 하는 많은 설교는 사람들의 양심을 각성시키고 심령에 생명을 불어넣는 거룩한 현시(顯示)가 없다.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고자 부르짖는 사람들과 그의 임재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이 적지 않으나 어떠한 훌륭한 철학적 이론이나 문학적 변론도 그들의 요구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의 주장이나 그들이 지어낸 이론은 무가치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하라. 전설과 사람의 학설과 격언만을 들어온 사람들에게 심령을 새롭게 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도록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자애를 주제(主題)로 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품성과 율법이 얼마나 신성한가에 대하여 많이 논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것들이 또한 그리스도의 종들의 논제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전하라. 율법의 요구와 복음을 밝히 설명하라. 그리스도의 생애와 극기와 희생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그의 겸손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하여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가 지금 하늘 궁정에서 그들을 위하여 하시는 중보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요 14:3)하리라는 약속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릇된 학설에 대하여 토론하거나 복음의 반대자들을 상대로 싸우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라. 하나님의 보고로부터 나온 신선한 진리가 생활 속에 번쩍이게 하라.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 41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사 32:20)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말하는 것을 중지해서는 안 된다.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렘 23:28).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5, 6).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여기에 모든 교육 사업의 기초가 되는 대 원칙이 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있다. 다른 문제들이 그들의 정신을 점령하고 있다. 그리고 불신자들의 저서를 연구하는 일이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으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에도 회의론적 사상들이 섞여 있다. 그뿐 아니라 과학 분야에 있어서도 그 발견된 것들이 잘못 해석되고 악용됨으로 인하여 과학적 연구가 오도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 가상적 학설과 비교되고 있으며, 드디어는 불확실하고 미덥지 못한 것같이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의혹의 씨가 청년들의 마음속에 심어지게 되어 그들이 시험을 만나게 되면 심겨진 의혹의 씨가 발아되어 싹이 튼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심령은 보호자와 안내자를 잃게 되므로 청년들은 하나님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탈선하게 된다.

오늘날 이 세상에 죄악이 널리 퍼지고 있는 주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할 때에는 죄된 본성에서 치밀어 오르는 악한 정욕을 제어할 능력이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육체를 위하여 심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된다.

또한 여기에 사람들의 정신을 쇠퇴시키고 무능력하게 만드는 원인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저서에 몰두하게 되면 그들의 마음은 편협해지고 천박해진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영원한 진리의 깊고 넓은 원칙들과 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해력은 평소에 익숙한 사물에 대해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자연히 제한된 사물에만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이해력은 약하여지고 그 능력은 감퇴되어 얼마 후에는 더 넓힐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같은 모든 것은 다 그릇된 교육이다. 42 모든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청년들의 마음을 영감으로 기록된 진리의 말씀에 붙들어 매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현세나 내세를 위해 필요불가결한 교육이다.

이 교육이 과학적 연구를 방해하거나 교육의 수준을 저하시킨다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하늘처럼 높고 우주처럼 넓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생과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하는 일처럼 우리를 더욱 고상하게 하고 활기차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청소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이해하도록 노력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그들의 지력은 발달되고 그 일에 힘을 기울이는 동안 그 지력은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들은 더욱 넓은 사색(思索)의 분야로 인도되어 불멸의 지식의 보화를 풍성히 얻게 될 것이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얻어지는 교육은 구원의 경륜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43 이러한 교육이 심령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유혹을 대항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강하게 하고 요새화 해 줄 것이며 학생들로 하여금 세상에 자비의 기별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업에 그분과 더불어 동역자가 되기에 적합한 자가 되게 할 것이다. 또한 이 교육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하고 성도의 기업을 얻도록 준비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진리의 교사는 그 자신이 경험을 통하여 배운 것만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씨 뿌리는 자는 “자기의 씨”를 뿌렸다.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였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가르치실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 자신의 사상과 인격과 생활 경험은 모두 다 그분의 가르침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종들도 그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그들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충분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에는 그 말씀을 “아마 그럴 듯하다”거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나타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사도 베드로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고 말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의 종들과 모든 교사들은 사도 요한과 같이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요일 1:2)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흙-길가에 떨어진 씨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취급하고 있는 주된 문제는 씨가 뿌려진 땅이 씨의 발아와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로써 당신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실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셨다. 내가 하는 일을 비판의 안목으로 보거나 또 그것이 너희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44 너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너희가 나의 기별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너희가 나의 기별을 받고 안 받는 데 따라서 너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는 길가에 떨어진 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길가에 뿌려진 씨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듣는 자의 마음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고 있다. 마치 사람이나 짐승의 발에 밟혀 단단해진 길과 같이 그들의 마음은 세상적인 거래와 쾌락과 죄가 난무하는 대로가 되어 있다. 이기적인 목적과 죄악적인 방종에 몰두된 사람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히 3:13) 된 자이다. 그들의 영적 기능은 마비되어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그 비유가 저희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저희의 부족과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은혜로운 기별을 마치 저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간과해 버린다.

마치 새가 길가에 떨어진 씨를 재빨리 주워 먹는 것처럼 사단도 우리 심령에서 진리의 씨를 빼앗아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관심한 자들의 심령을 깨우치고, 완고한 자들의 마음에 감화를 끼칠까 두려워한다. 사단과 그의 부하들은 전도 집회에 참석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명을 주도록 힘쓰는 반면에 사단은 그 말씀이 아무 효과도 나타내지 못하도록 재빨리 활동한다. 그는 깊은 원한을 갚기 위해 나타내는 악착같은 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영혼들을 이끌고 계시는 반면에 사단은 마음에 감동을 받고 구주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려고 애쓴다. 45 그는 그들의 마음을 계략으로 점령해서 비평하게 하고 의심과 불신을 갖도록 조장한다. 설교자의 말과 태도가 청중의 마음에 맞지 않을 때 그는 청중들로 하여금 그같은 결점만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비하시사 그들에게 보내 주신 진리, 곧 그들에게 꼭 필요한 진리가 지속적으로 그들을 감동시키지 못하게 한다.

사단은 많은 조력자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서 진리의 씨를 빼앗는 유혹자를 도와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설교를 가정에서 비평의 주제로 삼고 있다. 그들은 세상의 강연이나 정치 연설가의 말을 비평하는 것과 같이 설교를 비판한다. 그들은 마땅히 여호와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그 기별을 소홀히 하고 비꼬는 말로 논평한다. 그들은 목사의 인격과 동기와 행동에 곁들여 동료 교인들의 품행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주고받는다. 혹독한 비판을 내리고, 잡담과 중상하는 말을 하되 흔히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한다. 부모들은 이런 일들을 그들의 자녀들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한다. 46 그렇게 함으로 부모들은 자녀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에 대한 존경심과 그들이 전한 기별에 대한 존경심을 소멸시켜 버린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소홀히 여기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가정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불신자가 되도록 교육을 받고 있다. 부모들은 왜 그들의 자녀들이 그처럼 복음에 관심을 갖지 못하고 성경의 진리를 그토록 의심하는지를 의아해 한다. 그들은 또 저희의 자녀들이 도덕적 감화와 종교적 감화를 받는 데 그처럼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해한다. 그들은 저희 자신이 보여준 모본이 저희 자녀들의 마음을 그토록 완고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좋은 씨는 뿌리를 내릴 곳이 없으므로 사단이 그것을 빼앗아 간다.

돌밭에 떨어진 씨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씨가 뿌려진 돌밭은 흙이 깊지 못하다. 싹이 곧 나기는 하나 그 뿌리가 돌을 뚫고 들어가 필요한 양분을 섭취할 수 없으므로 얼마 안 가서 말라 죽는다. 믿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 돌밭 청중이다. 선천적인 이기심이 땅속에 깔린 바위처럼 그들의 선한 욕망과 포부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그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정복하지 못하였다. 죄가 얼마나 흉악한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죄를 자각하고 겸손해지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쉽사리 진리를 확신하고 겉으로는 유망한 신자처럼 보이나 그들이 가진 믿음은 피상적일 뿐이다.

사람들이 믿다가 타락하는 것은 도를 너무 빨리 받아들인 연고도 아니요, 기쁨으로 받아들인 까닭도 아니다. 47 마태는 구주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즉시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임할 때 우리가 즉시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동시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에도 기쁨이 있다. 그러나 이 돌밭에 뿌려진 씨의 비유에 의해서 지적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받기는 하지만 거기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지 않는 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생활 습관을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하여 보고 자신을 전적으로 그 말씀의 지배에 맡기지 않는다.

식물의 뿌리는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 식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양분을 빨아들여 식물 각 부분에 보낸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다. 영적 생명이 영양 공급을 받는 것도 믿음을 통해서 사람의 심령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연합을 유지함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돌밭 청중은 그리스도 대신에 자신을 의지한다. 그들은 저희의 선한 행실과 순간적인 선한 생각을 의뢰하고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강하지 못하며 그의 굳센 능력 안에서 강건하지 못하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 속에 뿌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 햇볕은 튼튼한 곡식은 강하게 하고 잘 익게 하지만 뿌리가 깊지 못한 곡식은 시들게 만든다. 이와 같이 “뿌리가 없”는 자는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진다. 많은 사람은 복음을 받지만 그들이 죄에서 구원을 얻기보다는 고통을 피하는 방편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종교가 저희를 고난과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얼마 동안 기뻐한다. 그들은 생활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동안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일지 모르나 풀무불의 연단과 같은 어려운 시험을 받게 될 때에는 엎드러지고 만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이 품고 있는 어떤 죄를 지적하거나 그들에게 극기와 희생을 요구하게 될 때 그들의 감정은 몹시 상한다. 48 그들의 생애에 어떤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엄청난 큰 노력이 요구된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불편과 시련만을 보고 영원한 사물을 잊어버린다. 그들은 예수를 떠난 제자들처럼 서슴지 않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고 말한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성령의 깊은 감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기호에 따른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저희의 구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그가 저희에게 죄를 이길 능력을 주실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 계신 구주와 개인적 관계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저희의 품성은 선천적인 결함과 후천적인 결함을 모두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성령의 역할을 총체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회개를 요청하는 책망자로서의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으며 또 자기 자신과 죄에 대하여 종이 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같은 상태를 개선하고자 애를 쓰고 있으나 저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는다. 그들은 저희 자신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고 그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거룩한 능력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형성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막연하게 저희의 결함을 시인하나 그 죄를 낱낱이 구별하여 버리지는 않는다. 악을 행할 때마다 우리의 이기심은 점점 강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진리의 말씀을 스스로 깨닫는 데 있다. “거듭나야 하겠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7, 3).

참된 성결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아가는 데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다. 49 그리스도께서는 전적인 헌신과 온전한 봉사를 요구하신다. 그분은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기를 요구하신다. 자아를 소중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사랑이 모든 행위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를 이루는 원칙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오직 이것만이 그리스도인들을 견실하게 하고 보호해 줄 수 있다. 이 사랑만이 시련과 시험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사랑은 또한 희생을 통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구속의 경륜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이 희생은 너무도 넓고, 깊고, 높기 때문에 아무도 측량할 수 없다.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셨으므로 그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저희의 구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저 없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구주의 영예와 영광을 먼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를 위해 살고, 그에게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그를 위해 일하기를 기뻐하게 될 것이다. 50 그리고 그 일은 몹시 가벼울 것이다. 우리는 그를 위해 고통과 수고와 희생을 자청하게 될 것이다. 인류의 구속을 위한 그분의 열망(熱望)을 우리도 가지게 되고 그분이 느끼셨던 영혼에 대한 부드러운 간원을 우리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이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 기만이다. 진리의 이론이나 그의 제자라는 공언만으로는 어떤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것이 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목적의식이 약해지고 갈망이 늘 변하는 것은 전심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를 겸하여 섬기려는 노력은 결국 우리로 돌밭 청중이 되게 할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시험이 이를 때에 그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복음의 씨는 가끔 가시떨기와 잡초 속에 떨어지는 수가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도덕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종래의 습관과 행위와 죄된 생애를 버리지 않고, 또한 사단의 특성들을 심령 속에서 끊어 버리지 않는다면, 발아된 씨는 질식될 것이다. 가시가 돋아나서 그 곡식을 덮어 마침내 다 죽게 만들 것이다.

귀한 진리의 씨를 받기 위해 항상 준비되어 있는 마음속에서만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잘 자라날 수 있다. 죄의 가시떨기는 어떤 땅에서든지 자란다. 가시떨기는 가꾸어 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곡식은 반드시 잘 가꾸지 않으면 안 된다. 찔레와 가시는 언제나 빨리 자라게 됨으로 제초하는 일이 늘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지배하에 두지 않거나 성령이 끊임없이 품성을 세련시키고 고상하게 하지 않으시면 옛 습관은 우리의 생애 속에 저절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비록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으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결되지 않으면 저희의 고백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 51 죄를 이기지 않으면 죄가 저희를 이기게 된다. 가시떨기를 잘라 버렸을지라도 뿌리가 뽑히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그것이 다시금 속히 자라서 그 덩굴이 영혼을 덮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심령을 위태롭게 하는 일들에 대하여 주의를 주셨다. 마가는 그것들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욕심과 다른 모든 물욕이라고 말했고, 누가는 이 세상의 염려와 부와 쾌락을 열거하고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막고 영적 씨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사람의 심령이 그리스도께로부터 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그의 영성은 사멸해 버린다.

“세상의 염려”. 어떤 계층의 사람들을 막론하고 세상의 염려로 시험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고역(苦役)과 빈곤과 궁핍의 염려가 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또 무거운 짐이 된다. 부자에게는 재물을 잃어버릴 염려와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들의 꽃에서 배우라고 그분께서 당부하신 공과를 잊어버린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보호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의 짐을 그리스도께 맡기지 아니하므로 그분은 저희의 짐을 지실 수 없다. 그리하여 생활의 염려가 그들로 그리스도께 가서 도움과 위안을 얻도록 하는 대신에 그것들이 오히려 그들로 그분에게서 떠나게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많은 열매를 맺힐 수 있는 사람들이 재물을 모으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 결과로 그들의 모든 정력을 그들의 사업에 바치게 되어 자연히 영적 사물을 등한히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희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게 한다.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롬 12:11)라고 명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도움이 요구되는 자들을 위하여 응분(應分)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을 해야 하고 사업에도 종사하여야 한다. 저희는 죄를 짓지 않고서도 이 일을 능히 할 수 있다. 52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업에 너무나 열중하기 때문에 기도할 시간도, 성경을 연구할 시간도 없고 하나님을 찾아 섬길 시간도 없다. 때때로 그들의 심령이 성결하게 되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사모하지만 그들은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떠나 장엄하고 위엄 있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시간이 없다. 영원한 사물은 부차적이 되고 세속적인 사물이 으뜸으로 삼아진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심령의 활력이 세속의 가시떨기를 자라게 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과는 전혀 같지 않은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많은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과오에 빠진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지만 저희의 임무가 너무 무겁고, 책임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할 시간이 없을 만큼 분주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을 등한히 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신 말씀을 잊어버린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떠남으로 인해 저희의 생애에 그분의 은혜가 결핍되어, 자기 자신의 특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봉사는 남보다 높고자 하는 욕망과 제어되지 못한 거칠고 추악한 성벽으로 인하여 더럽혀진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봉사가 실패하게 되는 주요 원인 중에 하나이며, 사업의 결과가 미미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재리의 유혹.” 재물에 대한 사랑에는 사람을 호리고 기만시키는 힘이 있다. 흔히 세상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저희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어버린다. 그들은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신 8:17)고 말한다. 저희의 재물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는 대신에 저희 자신을 높이게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이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리는 동시에 저희 동포들에 대한 의무감마저도 잊어버린다. 저희 재물을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향상을 위하여 주어진 달란트로 여기는 대신에 그것을 자신들을 섬기는 방편으로 삼고 있다. 그렇게 사용된 재물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특성을 계발시키는 대신에 사단의 특성을 조장한다. 그리하여 말씀의 씨는 가시떨기에 덮여 기운이 막히게 된다.

53 “이생의…일락”. 자기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추구하는 오락에는 위험이 있다. 체력을 약화시키고, 정신을 흐리게 하며, 영적 식별력을 마비시키는 모든 방종의 습관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벧전 2:11)이다.

“기타 욕심”. 이것은 그 자체가 죄악적이 아니라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보다 다른 무엇을 더 귀히 여기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든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과 그리스도께 대한 애정을 빼앗아가는 것은 영혼의 원수가 된다.

젊은이의 기름진 마음밭

한창 자라나는 원기 왕성한 청년 시절에는 자기중심적인 야망과 자기를 섬기고 싶어 하는 커다란 유혹을 만나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세속적 사업의 성공으로 인하여 양심을 마비시키고 참으로 훌륭한 품격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평가하지 못하게 하는 일에 계속 빠져들어갈 수 있다. 그리하여 환경이 이를 조장하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금지하는 방향으로 자라가게 될 것이다.

자녀들의 발육기에 있어서 부모들의 책임은 실로 크다. 부모들은 청년들이 인생과 인생의 참된 성공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도록 올바른 감화로 그들을 두를 수 있도록 연구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자녀들의 세속적 번영을 첫째 목적으로 삼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친구를 택하는 일에 있어서도 이러한 목적을 참작해서 선택한다.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가정을 대도시 속에 두고 자녀들을 유행이 난무하는 사회로 안내한다. 그들은 자녀들의 주위를 속화(俗化)와 교만을 조장하는 감화로써 둘러싸고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결과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이 쇠미해질 뿐 아니라 높고 고상한 인생의 목적도 잃어버린다. 영생을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과 딸 될 특권을 세속적 이익과 바꿔 버린다.

54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의 향락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족시켜 줌으로 그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려 한다. 부모들이 자녀들로 온갖 운동 경기를 하도록 허락하고 재미있는 각종 연회 장소에 가도록 허락할 뿐 아니라 허식(虛飾)과 자기만족을 위하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을 마련해 준다. 그러나 쾌락에 대한 욕망은 빠져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강렬해져서 급기야는 그들의 흥미가 이곳에만 쏠리게 되어 그것을 인생의 원대한 목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게으르고 방종하는 습관을 갖게 되어 거의 견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어야 할 교회까지도 오락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을 조장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종교적인 목적을 위하여 자금을 모금할 때 많은 교회들이 어떠한 방법을 쓰고 있는가? 바자회와 만찬회와 자선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경품 뽑기와 그와 유사한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거룩히 구별된 장소가 먹고 마시는 일과 사고파는 일과 온갖 놀이로 그 신성성이 더럽혀지는 때가 종종 있다. 그리하여 예배당에 대한 존경심과 예배에 대한 경건함이 청년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린다. 자제의 방벽은 약해지고, 이기심과 식욕의 방종과 허식을 사랑하는 일이 그들의 마음을 끈다. 그것들은 방종될수록 더 강해진다.

도시는 쾌락과 향락의 중심지가 되어 있다. 많은 부모들이 도시가 저희 자녀들에게 유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위하여 도시 생활을 선택하지만 마침내 실망하게 되고 너무 늦은 다음에야 저희의 큰 실책을 후회하게 된다. 오늘날 도시는 급속히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어가고 있다. 많은 휴일이 나태함을 조장시킨다. 극장에 가는 일과 경마와 도박과 음주와 흥청거리는 흥분적인 오락들이 온갖 욕정을 극도로 자극시킨다. 청년들은 유행의 풍조에 휩쓸려간다. 자신의 향락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조수같이 밀려드는 유혹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55 그들은 사교적인 오락과 경박한 환락에 몰두하게 되고,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과의 교제가 저희의 마음을 취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한 가지 형태의 방탕에서 다른 형태의 방탕을 즐기도록 인도되어 마침내는 보람 있는 생애를 보내기 위한 좋은 소질과 욕구를 잃어버리게 된다. 신앙에 대한 그들의 열망은 식어지고 그들의 영적 생애는 어두워진다. 심령의 모든 고귀한 기능들이 마비되고 사람을 영적 세계와 교통할 수 있게 하는 모든 능력이 저하된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 것이 사실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심령에 상처를 냈고 일생동안 위험 부담을 안고 살아야 한다. 선악을 분별하는 데 명민하여야 할 그들의 식별력은 크게 손상을 입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인식하는 데 민감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단의 계책도 분별하지 못한다. 위기에 처하게 될 때에 그들은 시험에 굴복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가는 일이 너무도 많다. 쾌락을 사랑하는 생애의 결국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모두 파멸일 뿐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행해지는 인생의 게임에 사단은 근심과 재리와 쾌락 모두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주어졌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 16). 사람의 마음속을 펴놓은 책처럼 들여다보시는 그분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눅 21:34)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기록하였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 10).

마음밭의 준비

56 그리스도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그 뿌린 결과가 토지의 여하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모든 경우에 씨 뿌리는 자와 씨는 다 동일하다. 그렇게 하심으로 주님께서는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생활 속에서 기대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이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 결과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에 속한 청중들일지라도 그러한 상태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성령은 늘 사람을 세상 사물에 몰입시키는 마력을 깨뜨리시고 그들로 썩지 아니할 보화를 찾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고자 노력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주의하고 등한히 하게 되는 것은 성령을 거역한 결과이다. 좋은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마음이 완고해지고 그것의 성장을 저해하는 악이 자라게 된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마음 밭은 잘 갈려져야 한다. 흙은 죄에 대한 깊은 회개를 통해 잘게 부서져야 한다. 유해한 사단의 잡초는 뽑아 버려야 한다. 가시떨기에 덮였던 밭은 부지런한 노력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천적으로 악한 성질도 예수의 이름과 힘을 의지하며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렘 4:3)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호 10:12).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이루고 싶어 하시며, 우리에게 그와 협력하기를 요청하신다.

57 씨를 뿌리는 자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설교를 너무 많이 하고 진정으로 마음과 마음을 통하는 일은 너무 적게 하고 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일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동정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가까이 접촉해서 영생에 관한 중대한 문제에 그들의 관심을 일깨워 주도록 힘써야 한다. 그들의 마음이 밟혀 굳어진 한 길처럼 단단하여 겉보기에는 그들에게 구주를 소개하는 일이 전혀 허사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론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변론으로 설복시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개인적 봉사를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돌 같은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진리의 씨가 뿌리를 내리게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씨를 뿌리는 자들도 그 씨가 가시덤불에 기운이 막히지 않게 하고 흙이 얕아 말라 죽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에 신앙의 기초가 되는 원칙을 잘 배워야 한다. 58 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들의 생애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들의 품성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들에게는 져야 할 짐이 있고 고쳐야 할 타고난 나쁜 본성이 있다는 것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좋은 군사로서 자기를 부정하고 어려움을 참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이 큰 축복임을 배워야 한다. 그들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지하고 그분께 그들의 모든 염려를 맡기도록 가르치라. 그들로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기쁨을 맛보게 하라, 그렇게 하면 그들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과 관심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속적인 쾌락이 그 매력을 잃게 되고 우리를 낙심케 하는 온갖 짐들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진리의 보습이 자기의 일을 하게 되어 묵은 땅을 갈아엎을 것이다. 땅위에 나와 있는 가시덤불을 자를 뿐 아니라 뿌리까지도 뽑아 버릴 것이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씨 뿌리는 자가 늘 실망만 당하는 것은 아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에 대하여 구주께서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즉 “좋은 땅에 뿌렸다는 것은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써 말씀을 듣고 지키며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이 비유 가운데 말씀한 “착하고 어진 마음”은 죄가 없는 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은 잃어버린 자들에게 전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말씀하셨다.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자는 마음이 착한 자이다. 그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필요를 느끼는 자이다. 그는 진리를 알고자 하고 그것을 순종하고자 진정으로 열망하는 자이다. 59 어진 마음은 믿는 마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진 마음이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런 사람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이다. 그리스도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고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기 때문에 진리가 저희 마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고의적인 무지와 짐짓 스스로 취한 무분별에 대해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교훈에 마음 문을 열고 믿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는 그들이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을 믿었기 때문에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좋은 밭으로 표상된 청중은 그분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살전 2:13)으로 받는 자들이다. 성경을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는 자만이 참으로 배우는 자이다. 그는 그 말씀을 인해 떨게 될 것인데 이는 그 말씀이 그에게 생생한 현실(現實)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해하려는 자세로 마음문을 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 한다.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이 바로 이러한 청중에 속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사도 베드로에게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고 말했던 것이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사람의 지적 능력보다는 그것을 얻고자 하는 순수한 목적과 열렬하고 진실하며 단순한 믿음의 여하에 많이 달려 있다.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도를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천사들은 가까이 할 것이며, 그들에게 풍성한 진리의 보화를 열어 보이기 위하여 성령이 보내질 것이다.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청중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할 것이며 사단이 자기의 모든 악한 부하를 총동원할지라도 능히 그 말씀을 빼앗을 수 없다.

말씀을 듣거나 읽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성경에서 유익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에게 제시된 진리를 깊이 명상해야 한다. 60 그는 열심히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뜻을 알고자 하고 그 거룩한 말씀의 깊은 의미를 맛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웅대한 사상과 순결한 생각으로 가득 채우라고 명하신다. 그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묵상하고, 구원의 대 경륜에 나타난 그분의 기이한 역사를 연구하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진리를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마음의 순결과 사상의 명료함을 바라는 우리의 욕구가 더욱 고상하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거룩하고 순결한 분위기에 젖어 있는 심령은 성경 연구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것이다.

“열매 맺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은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마음속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선행(善行) 속에 나타날 것이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과 생애가 그들의 품성과 생애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에 대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요 5:30)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 성경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고 말한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유전과 후천적으로 이루어진 품성과 생활습관 등과 충돌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청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 계시된 모든 요구 조건을 다 받아들인다. 그러고는 그의 모든 습관과 관습과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킨다. 그는 유한하고 허물 많은 인간의 말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하면 전혀 보잘것없다는 견해를 갖게 된다. 그는 전심을 다해 오직 한 가지 일념으로 영생을 구하게 되고, 모든 손실과 박해와 죽음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리를 순종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내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고난과 시험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환난이 올 때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불안해하거나 불신하거나 낙망하지 않는다. 61 비록 우리가 사건의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없고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분간할 수 없지만 우리의 담대함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윽한 자비를 기억하고 우리의 염려를 그분에게 맡기는 동시에 인내로써 그분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

투쟁을 통하여 영적 생애는 힘을 얻게 된다. 시련을 잘 견디게 되면 그것이 견실한 품성과 보배로운 영적 미덕을 계발시켜 줄 것이다. 믿음과 온유와 사랑의 완전한 열매는 흔히 풍파와 역경 속에서 가장 잘 성숙된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비와 늦은비를 기다리나니”(약 5:7).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길이 참아 그의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때때로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이 열매가 가장 잘 발육될 수 있는 환경에 처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히 생각하며 낙심한다. 그러나 성장하고 결실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이러한 미덕을 계발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굳게 붙잡고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그 말씀에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것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더욱 강하고 완전한 정신이 우리를 주관하게 될 것인데 이는 우리가 길이 참는 능력의 근원이신 자와 산 연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한 생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보통 사람과 같은 이기적인 생활을 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며 그의 품성이 우리의 성품 가운데 재현(再現)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 가 되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