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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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稅吏)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 바리새인이 예배하러 성전에 올라간 것은 자기가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의 예배가 자신을 하나님께 칭찬받을 사람으로 추천하는 행위로 생각하는 동시에 사람들로 자기의 신앙을 우러러보게 하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은총을 받고 싶어했다. 그의 예배 행위는 이기심에서 발단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자기를 칭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그의 태도, 그의 행동, 그의 기도가 그러하였다. 그는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 하는 태도로 다른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따로 서서 기도하였다. 그는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하나님도 사람도 다 같이 자기를 보고 틀림없이 만족해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자기의 품성을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에 비추어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품성에 견주어 판단하였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사람에게로 향했다. 이것이 그가 자기만족에 빠진 원인이다.

그는 자기의 착한 행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바리새인의 신앙은 그의 심령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경건한 품성, 즉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마음을 구하지 아니하고 외적생애로 나타내는 신앙만으로 만족하였다. 그의 의는 자기 자신의 것, 즉 자신의 행실의 열매요, 사람의 표준으로 정한 의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멸시할 것이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자기 자신을 평가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평가했다. 그의 의도 다른 사람의 의를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가 낮을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은 더욱 의롭게 보였던 것이다. 그의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이 남을 비난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라고 비난하였다. 이로써 그는 형제를 참소하는 사단의 정신을 나타냈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아무런 축복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세리도 다른 예배자들과 같이 성전에 올라갔으나 즉시 자기 자신이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들로부터 좀 떨어져서 예배를 드렸다. 세리는 멀리서서 극심한 고민과 자책을 느끼면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하였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고, 자기 자신이 죄 많고 누추한 인간임을 깊이 느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어떠한 동정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만한 아무런 공로도 없음을 알고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고 외쳤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않았다. 152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한 자각에 압도되어 홀로 하나님 앞에 섰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죄 사함을 받고 마음에 화평을 얻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그의 유일한 간구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축복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러 오는 사람들을 대별해서 두 계층으로 나눌 때 이들 두 계층을 대표한다. 이 두 계층을 나타내는 대표적 인물은 최초에 이 세상에 출생한 아담의 두 아들에서 볼 수 있다. 즉 가인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만 가지고 왔다. 그는 죄를 고백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자비의 필요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예표하는 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나올 때에 자기 자신이 죄인이며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것을 자복하였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공로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돌아보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돌아보지 아니하셨다. 필요를 느끼고 우리의 궁핍과 죄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실 수 있는 첫째 조건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바리새인과 세리로 대표된 두 계층에 대한 교훈은 사도 베드로의 생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제자가 된 초기에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리새인처럼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저녁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막 14:27) 고 예고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자신 있게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막 14:29)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자신의 위험을 알지 못했다. 자부심(自負心)이 그의 판단을 그르쳤다. 그는 자기 자신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뒤 시험이 이르러 왔을 때 그는 저주와 맹세로써 그의 주님을 부인하였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예수의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가 이제 막 저질러 놓은 일에 대하여 놀라움과 충격을 느끼면서 자기의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154 바로 그 순간에 그리스도께서도 그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뒤섞인 서글픈 눈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그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를 그윽이 바라보시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통회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전환점에 이르러 베드로는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하였다. 그는 세리처럼 통회하고 회개하였고 세리처럼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 그를 바라보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에게 용서를 보증해 주었다.

이제 그의 자부심은 사라졌고 전에 자만스럽게 장담하던 말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세 번 베드로를 시험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는 자기 형제들보다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아니하였다. 그는 다만 자기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에게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고 호소하였다.

그 후에 베드로는 그의 사명(使命)을 받았다. 그 일은 지금까지의 사명보다 더 광범위하고 신중함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양과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주께서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신 영혼들을 돌보도록 베드로에게 청지기의 직분을 맡기실 때에 그분은 그의 실패가 회복되었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침착성이 없고 오만하고 자부심이 강했던 제자 베드로는 자신을 굴복시키고 깊이 통회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극기와 희생으로써 자기의 주님을 따랐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에 베드로도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다.

155 베드로를 타락하게 만들고 바리새인으로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게 막은 악이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멸망시키고 있다. 교만과 자부심만큼 하나님께 더 가증스럽고 사람의 심령에 더 위험한 것은 없다. 교만은 모든 죄 중에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고치기 어려운 죄이다.

베드로의 타락은 갑자기 된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자부심은 그로 하여금 구원을 얻었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그로 하여금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도록 만들어 마침내 자기 선생님을 부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자아에 대한 확신을 갖거나 시험에 대한 위험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안전치 못하다. 구주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무리 진실하게 회개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을 해 주거나 그러한 생각을 갖도록 가르쳐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그릇 인도하는 것이 된다. 모든 사람에게 희망과 믿음을 갖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분이 우리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안다 할지라도 우리가 전혀 시험을 받지 않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단 12:10)라고 하셨다. 시험을 참고 견디는 자만이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약 1:12 참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최초의 확신을 가지고 ‘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의지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볼 줄 모르며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들은 사단의 음모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시험이 올 때에 베드로처럼 매우 깊은 죄의 구덩이에 빠져 버린다.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권면이 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우리의 유일한 안전책은 언제든지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품성의 결함을 알고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의 필요성을 배울 필요가 있다.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시험을 면케하실 수는 없으셨으나 그의 실패에서 그를 구원하실 수는 있으셨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경고를 달게 받아들였던들 그는 그 일을 위해 깨어 기도했을 것이며 그의 발이 비틀거려 넘어지지 않도록 두려움과 떨림으로 행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했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사단이 그를 이기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베드로가 실패한 것은 자부심 때문이었고 그의 발이 다시 굳게 설 수 있었던 것은 회개와 겸비를 통해서였다. 이러한 그의 경험 속에서 회개하는 모든 죄인이 용기를 얻을 수 있다. 156 비록 베드로가 큰 죄를 범했을지라도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2)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가 심히 애통하고 뉘우칠 때에 그는 이 기도의 말씀과 사랑과 동정이 섞인 그리스도의 얼굴을 기억하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기억하시고 천사들에게 부녀자들이 전달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막 16:7). 죄를 사해 주시는 구주께서 베드로의 회개를 용납하셨다.

베드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나타내셨던 동일한 긍휼하심이 시험에 빠진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베풀어져 있다. 사람들로 죄를 범하게 하고 그들로 절망과 공포 속에 빠져 용서받기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특별한 계책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사 27:5)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가? 우리들의 연약함을 굳세게 하기 위한 모든 방편이 준비 되어 있고 그분께 오라는 온갖 격려와 초청이 주어져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기업인 당신의 백성을 다시 사셔서 그들에게 한 번 더 선발의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의 찔린 몸을 바치셨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흠 없는 생애와 순종과 갈바리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을 통해서 잃어버린 인류를 위하여 간구하셨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구원의 주께서는 단지 탄원자로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승리를 주장하시는 승리자로서 간구하신다. 그가 드린 제물은 완전했다. 우리의 중보자로서 는 당신 자신이 정하신 사업을 수행하고 계신다. 즉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와, 고백과, 감사의 향연(香煙)에 당신의 흠없는 공로를 섞어서 하나님 앞에 올리신다. 이것들은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좋은 향기가 되어 하나님 앞에 올라가게 된다. 이 제물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받으실 만한 것이 되어 그분의 용서가 모든 범죄를 덮어주게 된다.

157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속자와 보증인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는 어느 누구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 인류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을 보시고 그냥 계실 수가 없어서 그들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고 죽으신 그분께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동정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실 것이다.

그분은 떨면서 간구하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속죄를 통하여 선을 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사람을 위해 예비하셨으므로 그 능력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와 슬픔을 그분의 발 앞에 놓을 수 있다. 우리를 보시는 그분의 눈빛과 그분의 말씀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한다. 그는 자기의 뜻을 따라 우리의 품성을 조성하고 도야(陶冶)하실 것이다.

아무리 사단이 온 힘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단순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맡기는 영혼은 결코 정복할 수 없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29).

15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렘 3:13),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겔 36:25)라.

그러나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하고 자신에 대한 이같은 지식이 우리로 통회하게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용서와 화평을 얻을 수 없다. 바리새인은 죄에 대한 자책을 느끼지 않았다. 성령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스스로 의롭다는 갑주에 싸여 있었으므로 천사의 손이 정조준해서 던지는 날카로운 하나님의 화살도 그것을 꿰뚫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만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눅 4:18)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눅 5:31)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위험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피난처로 달려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상처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치료를 받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7, 18). 불로 연단한 금은 곧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활기차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나 사랑 곧 그리스도의 마음에 있었던 그같은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늘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다.

159 아무도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마음에 없는 겸손을 입술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께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하는 중에도 마음속에는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겸양(謙讓)의 덕이 풍부하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그처럼 높이는 까닭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순결하심과 탁월하심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가난함과 결점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른 모든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의롭다는 두루마기를 입고 있으며 아무 소망도 없이 잃어버린바 된 자들임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세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은 그 기도가 전능하신 자를 붙잡으려는 의뢰심을 보여 준 까닭이다. 세리의 생각에는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수치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도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믿음, 곧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는 믿음으로 주님께 간구하는 궁핍한 자들은 무한하신 능력을 붙잡아야 한다.

어떠한 외형적 의식도 단순한 믿음과 자아를 완전히 포기하는 일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비울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해 주시도록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허락할 뿐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심령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될 것이다. “주여, 저는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릴 수 없사오니 당신이 제 마음을 취하소서. 제 마음은 당신의 소유물이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하여 그것을 보존할 수 없사오니 당신이 그것을 깨끗이 보존하옵소서. 비록 제가 연약하고 제 자신이 그리스도와 같지 않을지라도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저를 재창조하사 당신의 사랑이 저의 심령 속을 통하여 흐를 수 있는 순결하고 거룩한 분위기 속으로 저를 이끌어 올리소서.”

이와 같이 자아를 포기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처음 시작할 때에만 할 것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마다 거듭되어야 한다. 160 우리의 모든 선행은 우리 자신 밖에서 오는 능력에 달렸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찾는 일과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심령을 낮추는 일이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에만 우리는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갈수록 더욱 똑똑하게 그분의 품성의 순결함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더욱 분명하게 우리의 죄의 심히 가증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더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인정하는 자들은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자가 되어 하늘의 빛과 권능을 받음으로 큰 영예를 얻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치욕스러운 무서운 경험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의 죄는 용서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를 실족하게 한 품성의 약점을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고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사도나 선지자들 중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과, 알면서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저들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하고자 했던 사람들과, 하늘의 빛과 권능을 받아 영예롭게 되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그들은 육신을 의지하지 않았고 저희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온전히 의지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경험 가운데서 전진하는 발걸음마다 우리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다. “그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고 하신 말씀은 주님께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 곧 주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신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161 그분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62, 63). 그 때에 우리의 입술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만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는 사도의 고백을 우리 자신의 고백으로 삼을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 2:12, 13)신다는 말씀은 이러한 경험과 일치되는 명령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 주지 못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나 그분의 자비하심이 부족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그대의 뜻이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되지 못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그대의 선천적·후천적 성벽이 그대의 생애를 지배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자아가 그대의 영혼과 크신 일꾼이 되시는 주님 사이를 가로막아 장애가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라. 그대의 고집이 하나님께서 그대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고상한 목적을 좌절시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라. 자신의 힘을 의지할까 두려워하고 그대의 손이 그리스도의 손을 놓고 그분 없이 인생길을 걸어가려고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라.

우리는 교만과 자부심을 조장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첨과 칭찬을 주고받는 일을 삼가야 한다. 아첨은 사단이 하는 일이다. 그는 참소하고 비난하고 아첨한다. 이와 같은 모양으로 그는 영혼들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사람들을 칭찬하는 자들은 사단에게 이용당하는 그의 조수(助手)들이다. 162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교역자들은 모든 칭찬의 말을 물리치도록 하라. 그들로 자신을 숨기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게 하라, 만민의 눈을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신 그에게”로 향하게 하며 만민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찬송이 그분께 올라가도록 하라.

주를 경외하는 자의 생애는 슬픔에 젖어 있거나 우울한 생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얼굴에 슬픈 빛을 띠거나 나그네처럼 탄식하는 생애를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자존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자들은 개별적으로 그리스도와 산 연합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반석 위에 떨어지지 아니한 자의 마음은 자기가 완전하다고 자랑한다. 사람들은 웅장한 종교를 원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갈 만한 넓은 길로 걸어가기를 원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신망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칭찬을 받고자 하는 생각은 구주를 저희 마음속에서 내쫓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기쁨의 샘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의 근원이 된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은 바위틈에 숨기어져 있을 때였다. 이와 같이 우리도 갈라진 바위되시는 그분 안에 숨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못에 찔리신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덮어 주시고 당신의 종에게 하셨던 말씀을 들려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출 34:6, 7)시는 하나님이심을 친히 나타내 보여 주실 것이다.

구속 사업은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온다. 163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그리스도의 능력에 이끌린 죄인이 십자가 앞에 나아가 부복할 때에 그는 새로 창조함을 받는다. 그는 새 마음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게 된다. 그리고 더 요구될 것이 없는 거룩함을 입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 3:26)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입은 수치와 타락은 몹시 크다. 그러나 구속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우리의 영예와 위대함은 더욱더 클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에게 탁월한 능력 곧 하늘의 보화가 주어져서 그들로 타락한 일이 전혀 없는 천사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 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사 49:7).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