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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장-손님 대접하는 정신을 나타냄*

80장 - 손님 대접하는 정신을 나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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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 성경은 손님 대접하는 정신을 실천하도록 많이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그 정신의 발휘를 하나의 의무로 명령할 뿐만 아니라 이 미덕의 실천에 대한 많은 아름다운 장면들과 거기서 연유되는 축복들을 알려 준다. 그것들 중 가장 첫째가는 것은 아브라함의 경험이다.

우리는 창세기의 기록에서, 그 부조가 뜨거운 여름철 정오에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 있는 그의 장막 문에서 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세 사람의 나그네가 지나가고 있다. 그들은 대접받고자 요구하지 않고 은총을 얻고자 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휴식을 취하지 않고 지나가도록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며, 위엄을 갖춘 부한 사람이며, 크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며, 항시 명령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 나그네들을 보고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혔다. 그는 지도자를 향하여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소서 라고 말하였다(창 18:2, 3). 그는 그들의 발에서 여행의 먼지를 씻어 줄 물을 직접 자기 손으로 떠 왔다. 그는 그들이 먹을 음식을 택하였다. 그들이 서늘한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 동안, 그의 아내 사라는 그들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들이 대접을 받고 있는 동안 그들 곁에 정중하게 서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친절을 단순한 여행자, 곧 지나가는 나그네로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에게 나타냈다. 그러나, 접대는 끝나고, 그의 손님들은 정체를 드러냈다. 그는 하늘의 천사들뿐 아니라 그들의 영광스런 사령관, 그의 창조주요 구속주이며 왕이 되시는 분께 봉사하였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계획이 공개되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리어졌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비록 거주지를 소돔에 정하고 있었지만 그 부조의 친절과 손님 대접하는 정신을 받고 있었다. 569 해질녘에 두 나그네가 도시의 성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악한 도시에서 그들에게 닥쳐올 분명한 위험을 깨닫고, 롯은 그들을 자기의 집으로 데려가고자 간청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과 가정에 초래될 위험은 생각하지 않았다. 위험 중에 있는 자들을 보호해 주고 집 없는 자들을 돌봐 주는 것이 그의 평생 사업의 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두 나그네에게 친절로써 나타낸 그 행동이 천사들을 그의 가정으로 영접해 들이게 하였다. 그가 보호해 주고자 한 그들이 그를 보호해 주었다. 그는 해질녘에 안전을 위하여 그들을 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은 새벽녘에 그와 그의 가족을 멸망하게 된 도시의 문 밖으로 안전하게 인도해 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공손한 태도가 당신의 말씀에 기록하기에 충분할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1천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후에, 그 말씀은 영감받은 한 사람의 사도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아브라함과 롯에게 허락된 특권은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대접하는 정신을 나타냄으로써, 우리 역시 하나님의 천사들을 우리의 가정으로 영접할 수 있다. 오늘날도 천사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사람들의 가정에 들어와 그들에게 대접을 받는다. 하나님의 얼굴 빛 가운데서 생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천사들과 동행하게 되며, 이 거룩한 천사들은 우리의 가정에 축복을 남겨 놓고 떠나간다.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교회에서 책임을 맡아야 할 자의 특징으로서 성령께서 제시해 준 조목 중 하나이다. 그리고, 온 교회에는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는 명령이 주어져 있다(벧전 4:9, 10).

손님을 대접하는 원리

이 교훈은 이상하게도 등한히 취급되어 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 사이에서까지 진정한 손님 대접의 정신은 거의 발휘되지 않고 있다. 570 우리의 백성들 중에서도 손님 대접의 정신을 나타낼 기회는 하나의 특권과 축복으로 마땅히 인정되어야 할만큼 인정되지 않고 있다. 오로지 사교성은 너무 적고, 난처한 마음이나 허식 없이 가족의 식탁에 둘 혹은 세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는 기질은 너무도 결핍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번거로운 일이라고 말한다. 만일, 그대들이, “우리는 특별히 준비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여러분을 영접합니다”고 말한다면 그대들에게 괴로움이 안 될 것이다. 뜻밖에 찾아온 손님은 가장 정성들여 준비하는 것보다 환영해 주는 것을 더욱 감사하게 생각한다.

마땅히 주님께 속한 시간을 방문객들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에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도적질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게 된다. 정성들인 접대를 준비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에게 기울여야 할 주의를 빼앗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들의 본을 따라 꼭 같은 길을 따르게 된다.

손님들을 대접하는 일에 있어서,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과 부담이 생기게 된다. 많은 종류의 음식을 식탁 위에 차려 놓기 위하여 주부는 과로하게 되고, 많은 요리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손님들은 과식을 하게 된다. 한 편에서는 과식으로, 다른 한 편에서는 과로로 질병과 고통이 초래된다. 이와같이 정성을 들인 잔치는 무거운 짐이 되고 손해가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형제 자매들의 이득을 돌봐 주기를 우리에게 바라신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관하여 실례를 보여 주셨다. 그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롬 16:1, 2). 뵈뵈는 사도를 대접하였다. 그는 두드러진 방법으로 보호가 요망되는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자였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그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나의 가족”을 위하여 그처럼 자주 나타나는 이기적 관심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571 이러한 정신을 품고 있는 모든 가정은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예시된 순결한 원칙에 의하여 돌이킬 필요가 있다. 자기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고 방문자들을 접대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많은 축복을 상실하게 된다.

우리의 사역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형제들이거나 나그네들이거나 간에 방문자들을 자주 접대해야 할 필요가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합회가 거기에 비용을 계산해 주어야 하고, 그들이 정규적으로 받는 급료 외에 이런 여분의 비용을 충당하기에 충분한 액수를 급여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모두에게 손님을 접대하는 사업을 맡기셨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합회나 교회를 위하여 손님을 접대하거나, 형제들이 그들의 형제들을 대접한 대가를 지불받는 것이 하나님의 지시에는 없다. 이것은 이기심에서 나온 결과이며,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사실들을 기록한다.

어떤 분야에서 복음 전도자로, 혹은 선교사로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여행하는 자들은 그들이 일할 교회의 교인들에게서 대접을 받아야 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어느 정도 개인적 희생이 따를지라도 이와 같은 일꾼들을 안락하게 해주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손님 대접하는 데 든 모든 비용을 계산해 두신다. 그분께서는 이 사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제들을 대접하고, 그 방문이 손님들과 그들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자들은 특별한 축복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로 하늘에 기록된다.

손님 대접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로써 손님 대접에 대한 교훈을 하셨다. 바닷가에서 배고픈 무리들에게 에워 쌓여 있을때, 그분께서는 먹이지 않은 채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심으로써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한 음식을 공급하셨다. 그러나, 그 식물은 얼마나 단순한 방법으로 제공되었던가! 572 거기에는 전혀 사치스러움이 없었다. 하늘의 모든 자원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으신 그분께서는 풍성한 식사를 사람들 앞에 차려 놓을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것, 곧 바닷가의 어부들의 매일의 식물만을 공급하셨다.

만일, 사람들이 오늘날 그들의 습관에 있어서 단순하고 천연의 법칙과 일치되게 생활한다면, 인간 가족의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 주게 될 것이다. 정신적 빈곤은 더욱 적어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일할 기회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치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심으로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끌고자 노력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제공해 주신 단순한 음식물은 그분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 곧 생애의 일반적 필요에 있어서 그들에게 대한 그분의 부드러운 보호를 보증해 주는 것이었다. 보리떡으로 먹이는 한 편, 그분께서는 생명의 떡을 또한 그들에게 주셨다. 여기에 우리에게 보여 주는 모본이 있다. 우리의 음식은 단순하고, 심지어 빈약할 수도 있다. 우리의 운명은 빈곤으로 둘러싸여 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자원은 떡 두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제자들의 자원보다 더 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과 접촉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부족이 채워지는 것을 보시게 될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를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는 기근의 때에 당신의 종을 이 여자에게 보내셔서 음식을 구하게 하셨다.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왕상 17:12-15).

573 이 페니키아 여인이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보여 준 손님 대접의 정신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믿음과 관대한 마음은 놀랍게 보답되었다.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니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왕상 17:15-24).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능력은 지금도 엘리야 당시와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 10:41)라고 하신 약속은 우리 구주께서 말씀하시던 당시와 다름없이 분명하다.

“내가 갚아 주리라”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40절)고 하신 말씀은 그분의 처음 제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당신의 성실한 종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분의 이름으로 나타낸 친절한 행위는 인정과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가족 중 가장 연약하고 가장 비천한 자일지라도 동일하게 부드러운 친절을 받을 자로 간주하신다. 574 그분은 “이 소자 중 하나에게”, 곧 믿음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마 10:42).

빈곤하기 때문에 손님 대접의 정신을 나타내지 못하게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생계를 위하여 투쟁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입을 얻기 위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성도들이라는 인간을 통하여 그분을 사랑하며, 신자들과 불신자들에게 친절을 보이고자 하고, 그들의 방문을 유익하게 만들고자 애쓰고 있다. 가족의 식탁과 가족 제단에서 손님들이 영접을 받고 있다. 기도할 때는 대접을 받는 자에게 감명을 주게 된다. 그리하여, 단 한번의 방문이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내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을 기록하시고, “내가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형제 자매들이여, 환대와 친절한 보호가 필요한 자들을 그대들의 가정으로 초대하라. 과시하지는 말라. 그러나, 그들의 필요를 깨닫거든, 그들을 데려와서 참된 그리스도인 친절을 보여 주라. 사교적인 교제에는 귀중한 특권들이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나누어 줄 때, 우리는 희망과 용기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후 1:4). 그러면,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겐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는 보증이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는 죄악과 유혹의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의 모든 주변에는 그리스도 밖에서 죽어 가는 영혼들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활동하기를 바라신다. 만일, 그대가 편리한 가정을 가지고 있다면, 집이 없는 젊은이들, 도움이 필요한 자들, 동정과 친절한 말과 존경과 호의를 갈망하는 자들을 가정으로 초대하라. 575 그대들이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자 할 것 같으면, 그대들의 사랑과 존경을 그리스도의 피로 산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는 경험 없는 자들, 긍휼과 동정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게 된다. 그들은 약하기 때문에 원조자가 필요하다. 젊은이들은 도움이 필요하다. 부드러운 사랑을 속절없는 자들과, 무지한 자들과, 작은 자들 중 가장 작은 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는 분의 힘에 의하여, 우리는 그들의 미래의 복리와 그리스도인 품성 형성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때때로 우리의 인내를 몹시 시험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말씀하신다(마 18:10). 그리고, 이런 영혼들을 돌보는 자들에게, 구주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마 25:40).이런 일을 하는 자들의 이마에는 희생의 관이 씌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늘에서 우리가 도와 준 젊은이들, 우리의 가정으로 초대한 자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지도해 준 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반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 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