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보감 1

본문보기

104장-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결혼*

104장 -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결혼*

주제제목없음

573 우리는 결혼 문제에 대한 열기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의 징조들 중의 하나가 되고 있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결혼 문제를 하나님과 상의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마음의 충동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종교, 의무, 원칙이 희생되고 있다. 두 사람의 결합을 과시하거나 지나치게 경축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행복한 결과를 가져 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당사자들로 하여금 보다 좋은 위치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결혼은 백 쌍 중에 한 쌍도 없다. 불행한 결혼으로 인한 악한 결과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한 결혼은 충동에서 나온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살펴볼 생각을 거의 하지 않으며, 경험자들과 상담하는 것을 구식으로 여긴다.

순수한 사랑의 자리를 충동과 거룩하지 못한 정욕이 대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단지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결혼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위태롭게 하며 하나님의 저주를 초래한다.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면서도 불신자와 결혼하는 큰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경우가 내게 나타났다. 그들은 불신자인 배우자가 진리를 받아들이겠지 하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일단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불신자인 배우자는 이전보다 더욱 진리로부터 멀어진다. 이렇게 하여, 신자인 배우자를 믿음에서부터 떠나게 하기 위한 원수의 교묘하고 끈질긴 활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불신자와의 결연으로 인한 영향

많은 사람들이 현재 진리에 대한 흥미와 확신을 잃고 있는 것은 스스로 불신과 밀접한 연관을 맺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혹, 의문, 불신의 공기를 호흡한다. 574 그들은 불신을 보고 듣는 가운데 마침내 그것을 품게 된다. 어떤이들은 그 세력에 항거할 용기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많은 경우에 그들의 믿음을 부지중에 약화되어 결국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사단의 계획은 성공하게 된다. 사단은 그의 대리자를 통하여 너무나 은밀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믿음을 지닌 배우자들이 자신들이 어디로 표류하는지를 깨닫기도 전에 믿음과 진리의 방벽들은 무너져 내리고 만다.

세상 사람들과 결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단은 많은 청년 남녀들의 결혼을 목도하는 시간이 그들의 신앙적 경험과 유용성의 역사를 종식하는 시간임을 잘 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진다. 그들은 얼마 동안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고자 노력할지 모르나, 그들의 모든 노력이 견고한 반대 세력의 항거에 부딪히게 된다. 한때는 그들의 신앙과 소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에게 특권과 기쁨이었으나,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한 그들의 배우자가 그것에 대해 흥미를 갖지 않음을 알게 되면서, 그들은 그 주제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리게 된다. 그 결과, 고귀한 진리에 대한 믿음이 마음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사단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회의론의 그물을 짜서 그들을 두른다.

합법적인 것을 그릇된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은 큰 죄가 된다. 진리를 공언하는 자들이 불신자들과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짓밟는다. 그들은 그분의 은총을 받지 못하며 회개해야 할 비참한 일을 저지른다. 불신자도 탁월한 도덕적 품성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지금껏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더없이 중요한 구원을 소홀히 하여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러한 결합이 이루어지지 말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 불신자의 성품은 예수님께서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다시 말해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으니 하고 말씀하신 그 청년의 품성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불신자가 신앙에 대하여 호의적이며,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한 가지 사실 외에는 모든 면으로 배우자로서 바람직하다고 호소하는 일이 간혹 있다. 신자 쪽에서 조금만 판단을 잘하면 불신자와 일생을 연합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건만, 십중 팔구 감정이 승리한다. 575 결혼 서약을 하는 순간부터 영적 쇠퇴가 시작되고, 신앙적 열정이 식어지며, 방벽이 하나씩 무너져 내려서, 마침내 둘 다 사단의 검은 깃발 아래 나란히 서게 된다. 피로연에서부터 세속의 정신이 양심과 믿음과 진리를 대항해 승리한다. 새 가정에서는 기도의 시간이 존중되지 않는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를 택하는 사이에 예수님을 잊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불신자가 새로운 관계에 대하여 아무런 반대를 나타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 진리의 주제를 제시하면서 연구하자고 주의를 끌면, 단번에 예민한 감정을 보인다.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와 결혼하지 않았소. 나는 마음이 혼란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소. 그러니, 이후로는 당신의 그 괴상한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마시오.” 만일, 신자가 그의 신앙에 대해 특별한 열성을 나타낸다면, 그리스도인 경험에 흥미가 없는 상대편에게는 그것이 불친절로 보일 것이다.

신자는 그의 새로운 관계에 있어서 그가 택한 배우자에게 어느 정도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교적이고 세속적인 오락들이 행해진다. 처음에는 마지못해서 하지만, 점점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의심과 불신이 믿음을 대신하게 된다. 한때 신실하고 양심적인 신자에다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던 자가 이제 와서 의심하며 방황하는 자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 지혜롭지 못한 결혼으로 말미암은 이 변화여!

솔직한 마음으로 문제를 바라봄

신앙적 원칙의 확실성을 시험하는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될 때, 각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마땅할까? 그는 모본이 될 만한 확고함을 가지고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나는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주일 중 일곱째 날이 성경상의 안식일임을 믿습니다. 576 우리의 믿음과 원칙들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보다 완전하게 알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면, 나는 더욱 세상과 다르게 되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계속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사랑을 찾지 못하고 진리 안에서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내가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세상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나는 당신이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것을 사랑하고요. 영적 사물은 영적으로 분별됩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이는 내게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볼 수도, 또 내가 섬기는 주님에 대한 나의 의무를 깨닫지도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내가 신앙적 의무 때문에 당신을 소홀하게 대한다고 느낄 것입니다. 당신은 행복할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나의 애정 때문에 질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신앙적 신념에 홀로 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관점이 바뀌고,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며, 당신이 나의 주님 사랑하기를 배울 때에, 비로소 우리의 관계는 새로와질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그의 양심이 인정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을 하게 된다. 이것은 그가 영생을, 모험을 하여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 값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예수님보다 세상을 택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자와 평생을 통하여 관계를 맺기보다는 차라리 미혼으로 남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신자에게 애정을 주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젊은 마음에는 결혼이 낭만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것에서 상상 속에 숨겨진 이런 모습을 벗기고, 결혼 서약에 내포된 막중한 책임을 인식하도록 하는 일은 어렵다. 이 서약은 죽음의 손이 갈라 놓기 전에는 결코 무효가 될 수 없는 끈으로 두 사람의 운명을 연결시킨다.

그들은 동행할 수 없음

영광과 명예와 불멸과 영생을 구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군사와 대열을 함께 하기를 거절하는 자와 혼인할 수 있는가? 577 그리스도를 주로 선택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께 순종한다고 공언하는 그대가, 흑암의 세력의 왕에 의해 지배되는 자와 관심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그러나, 이 얼마나 이상한 광경인가! 매우 밀접하게 결합한 사람들이 하나는 신앙에 전념하고 다른 하나는 무관심하고 부주의하니, 하나는 영생의 길을 추구하나 하나는 사망으로 통하는 넓은 길을 걷고 있다.

회심하지 않은 자와 결혼한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천국을 버렸다. 그들에게는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과의 동반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만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교제의 가치가 보잘것없는 것이란 말인가? 하늘이, 귀하신 구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위해 그 즐거움을 버릴 정도로 하찮게 평가되고 있단 말인가?

결혼 생활의 행복과 성공은 양자의 화목에 달려 있다. 속된 마음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나가 된 마음에 조화되겠는가? 한쪽은 마음의 충동을 따라 생각하고 행하면서 육체를 위하여 심는 반면, 다른 한 쪽은 이기심을 누르고 성향을 극복하며 자신이 종으로서 섬긴다고 공언하는 주님께 순종하는 생애를 살려고 노력하면서 성령을 위하여 심고 있다. 그러므로, 취미, 성향, 목적에 있어서 완전히 차이가 난다. 원칙에 확고 부동하게 서서 개심하지 않는 배우자를 설복시키지 못하는 한, 신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실망하여 하늘과 아무런 연관을 맺지 않고 있는 자와의 무익한 교제를 위해 그의 신앙 원칙들을 팔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옛 백성들이 다른 민족과 통혼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셨다. 이러한 금지는 당시의 히브리 인들이 우상 숭배자들과 결혼하여 이방 가족들과 연관을 맺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내려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방인들은, 진리의 빛을 받고도 고집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시대의 불신자들보다 더 희망적이었다. 578 현대의 죄인은 당시의 이방인들보다 훨씬 죄가 크다. 이는 복음의 빛이 그의 주위를 명백하게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양심을 어기는, 하나님의 고의적인 원수이다. 그분께서 이러한 결혼을 금하신 이유는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신 7:4)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의 금지령을 무시하는 모험을 감행한 자들은 신앙의 원칙을 희생하면서 그렇게 했다. 솔로몬의 경우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의 아내들은 그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