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뷰

[파워삼육人] 이방인 간호사로 병원장에 오르기까지, 심은미 동문(간호 83)

2019.09.25 조회수 992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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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포트 워싱턴 메디컬센터 심은미 병원장
인턴십·연수 프로그램 위해 32년 만에 모교 방문
떠밀리듯 들어간 간호학과…”좋은 학생 아니었다”
“성공 비결? 안 되는 이유보다 가능성부터 봐”

어드벤티스트 헬스케어(Adventist HealthCare, 이하 AHC)는 미국 워싱턴DC 지역 최대 규모의 병원그룹이다. 이 병원 인사담당자들이 지난 4월 우리 대학을 방문했다. 간호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턴십 및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서다. 간호학과는 방문단과 연수 과정의 세부 사항을 조율한 후 여름방학 기간 재학생 5명을 선발하여 미국 AHC에 파견했다. (관련기사▷간호대학, 美 AHC 병원그룹 연수 프로그램 운영)

이 연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방문단을 인솔해 우리 대학을 찾은 이는 AHC 산하 포트 워싱턴 메디컬센터(Fort Washington Medical Center)의 심은미 병원장. 우리 대학 동문이다.

간호학과 83학번으로 입학해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간 심 동문은 17년간 임상간호사 경력을 다진 후, 컬럼비아대에서 간호정보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이후 행정가로 커리어를 전환, 아브라조 웨스트 캠퍼스 병원, 셰이디 글로브 메디컬 센터, 어드벤티스트 헬스케어에서 간호이사(CNO), 행정원장(COO), 수석부원장(SVP) 등을 역임하며 단계적으로 조직의 최고위직 자리까지 올랐다.

지난 7월에는 포트 워싱턴 메디컬센터의 병원장(CEO)으로 취임했다. 간호사 출신으로서, 아시안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전례를 찾기 힘든 입지전적 인물. 성공 비결을 묻자 그는 “‘안 되는 이유’보다는 ‘가능성’부터 보는 긍정적인 성격”을 꼽았다.

“이상하게 사물이나 문제를 보면 가능성부터 보인다. 일에 겁을 내지 않고, 어떤 일이든지 아주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덕분에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시원시원한 말투에는 거침이 없었다. 행동파적인 기질이 답변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Q. 모국과 모교에 방문한 소감은.

“87년에 졸업했으니 32년 만에 모교에 왔다. 한국은 2번 정도 방문했는데, 사업차 잠깐 들르다 보니 학교까지 와볼 기회가 없었다. 오랜만에 오니까 무척 반갑고 좋다. 삼육동은 내 기억 속에 참 낭만적인 곳이다. 그때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풍경들이 정말 좋았다. 학교가 발전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다.”

Q. AHC그룹에 대해 소개해 달라.

“미국은 보통 여러 병원을 묶어 그룹 회사를 만든다. 이를 ‘헬스케어 시스템(Healthcare system)’이라고 하는데, 한국식으로 말하면 ‘병원재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룹 사업 중에는 병원 운영 외에도 외래사업, 가정간호사업, 의사 고용사업 등 여러 비즈니스가 있다.

개별 병원은 재무관리나 인적관리(HR) 등 여러 행정적인 업무를 직접 처리해야 하는데, 헬스케어 시스템에 들어오면, 회사에서 이런 일들을 종합적으로 관리해준다. 예를 들어 어떤 병원이 외래 확장 이슈가 있다고 하면, 개별 병원에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룹에서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Q. AHC에서 어떤 업무와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나.

“주로 건물을 새로 세우거나, 사업을 확장하는 일을 했다. 기획/전략 분야의 일도 많이 했다. AHC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회사에서 기획이나 전략을 별로 중요하게 보지 않았다. 지난 3~4년간 회사의 모든 프로젝트가 전체적인 기획/전략 하에 이뤄지도록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갖추는 작업을 했다. 지금은 회사 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고 있다.

재정적으로 허덕이던 외래사업을 흑자로 전환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1년에 470만 달러(56억4000만원) 정도 적자가 있었는데, 흑자 상태로 돌리는 데 3년 반 정도 걸렸다. 힘들었지만, 참 재미있었고 보람도 있었다.”

Q. 간호학과 학생들이 AHC에서 연수와 인턴십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삼육대를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AHC의 전체적인 사업 및 전략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나.

“회사의 기획과 전략을 세우면서 제일 문제로 두드러지는 부분이 ‘간호사 인력 부족’이다. 사업 확장을 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별히 AHC가 있는 워싱턴 DC 메릴랜드는 다른 곳보다 간호사가 많이 부족하다. 생활비나 물가가 비싼 편이라, 간호사들이 이곳에서 경력을 쌓고 가정을 꾸리면 떠나는 경우가 많다. 인근 간호대학과 협력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 심은미 동문(왼쪽)과 AHC 관계자들이 방학 중 연수를 앞둔 간호학과 학생들과 면담하고 있다.

Q. 모교라는 개인적인 이유도 작용했을 것 같은데.

“물론이다. 교육과정이나 정서, 내부사정에 대한 이해가 있고, 교수님들도 다 동문이나 후배다. 후배들의 해외 진출을 돕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 앞으로 삼육대 간호학과와 지속적으로 협력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학생들을 많이 채용하려 한다. 방학 중 인턴십 프로그램이 좋은 첫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Q. 실제 학생들을 만나 본 소감은.

“예상외로 영어를 굉장히 잘해서 놀랐다. 교수님들이 영어가 서툴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해서 걱정했는데, 너무 잘하더라. 조금만 손보면 실무에서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반골(反骨)의 간호학과생

Q. 학창 시절 추억을 말씀해주신다면.

“오복자, 신성례 교수님은 내가 학교 다닐 때도 교수님이셨다. 정현철 교수님은 동기에 실습도 같은 조여서 정말 친했다. 당시엔 남자가 간호사 한다고 해서 참 특이했는데(웃음). 이번에 학과장이 됐다고 해서 참 반가웠다. 강경아 교수님은 1년 후배인데, 학교 다닐 때 얘기를 참 많이 나눴던 기억이 난다.

교수님들께 물어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좋은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광천삼육고(현 서해삼육고)를 졸업했고, 삼육교육에 굉장히 자부심이 있었지만, 대학이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교수님들을 참 힘들게 했던 기억이 난다. 좀 진취적인 학생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실행 과정에서 교수님들 속도 썩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런 저를 다들 좋게 봐주셔서 감사했다.”

Q. 반골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간호학과도 부모님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들어갔다. 원래 철학이나 역사, 문학을 좋아했고, 도(道) 장원을 할 정도로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잘했다. 이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반대하셨다. 그때는 시국이 참 혼란한 시기였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시국에 많이 말려 들어갔다. 어머니께서 사회대학을 가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문학 공부를 하는 건 더더욱 안 된다고 하셨다. 이상주의적인 내 성격을 알고 계셨던 거다. 어머니가 편찮으셨는데, 삼육대 간호학과에 가지 않으면 낫지 않겠다고 하셨다.”

Q. 어쨌든 본인의 의지도 있었기에 입학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고민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간호학과에 가면 미국에 갈 기회가 있을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미국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 간호학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역시나 원하던 공부가 아니었기에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방황을 많이 했다. 물론 나중에 간호사가 되고 현장에서 일하면서 굉장히 보람과 만족을 느꼈다. 간호학 공부도 좋아해서 석사까지 했다. 그런데 그땐 그랬었다(웃음).”

Q. 왜 미국에 가고 싶었나. 어린 나이에 막연한 동경이었는지.

“그랬던 것 같다. 굉장히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종갓집 종손이시다. 고지식하고 전통적인 가정이다 보니 늘 답답해했고, 할머니는 항상 ‘다루기 힘든 애’라고 하셨다.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미국에 가는 것밖에 없겠다 싶었다.”

미국에서는 간호사를 보고 병원을 선택한다

심은미 동문은 1987년 간호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에 건너가기까지 3년 정도 한국에서 일했다. 당시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보건진료원 1기로 근무하고, 상계백병원에서 간호사로도 일했다. 그사이 결혼을 하고 첫 아이도 낳았다. 1991년 11월, 가족과 함께 학생비자로 미국에 건너간 그는 2달 만에 미국 간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영주권을 받아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병원에 입사했다. 꿈꾸던 미국 생활의 시작이었다.

Q. 미국에서의 간호사 생활은 어땠나. 한국과는 무엇이 달랐나.

“당시 한국의 간호사는 의사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쳤다. 간호사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환자가 살고 죽는데, 한국에서는 그걸 의사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간호사의 일이 환자의 치유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그걸 핵심적으로 이용하는 시스템이었다.

지금도 미국 사람들은 환자가 병원에 가는 이유가 간호사 때문이라고 한다. 수술을 다른 병원에서 하더라도, 수술한 다음 환자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잘 지켜봐야 하는데, 그 일을 간호사가 하기 때문이다. 간호사의 일이 굉장히 독립적이었고, 환자를 치유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와는 다른 큰 보람을 느꼈다.”

Q. 임상간호사로 일하다 행정직으로 커리어를 전환했다. 어떤 계기였나.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새로운 걸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뭐든지 3년을 하면 다른 걸 하고 싶어지더라. 처음 1년은 배우느라 재밌고, 그다음 1년은 그 배운 거로 자부심 있게 일하느라 재밌다. 그런데 3년쯤 되면 좀 시시해진다.

17년 동안 임상에 있었다. 외과, 신경외과, 심장내과, 심장외과, 중환자실까지 해보니 임상에서는 더 갈 곳이 없었다. 그러면 이제 올라가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컬럼비아대에서 간호정보학 석사를 시작했다. 공부도 일도 정말 너무너무 재밌게 했다.”

Q. 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커리어를 쌓아간다는 건, 유학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큰 도전이었을 것 같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이 처음에는 몰라서 용감하게 시작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간호지식이나 언어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점이었다. 나는 살면서 여자로서 인정받기보다는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남자들과 동등한 능력과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생각하는 좋은 간호사 상(像)은 좀 달랐다. 일을 빨리하고 잘하는 것보다 환자들을 어떻게 편안하게 해드리고, 그분들이 마음 쓰는 것을 어떻게 케어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그걸 ‘소프트 스킬(Soft Skill)’이라고 한다. 처음엔 그런 스킬이 별로 없었고 일만 열심히 잘만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어려움이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그런 문화적인 차이를 콕 집어서 말해주지 않는다. 물어봐도 얘기해주는 걸 꺼린다. 뭔가 다른 것 같기는 한데, 뭐가 다르고 잘못됐는지 알아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간호사 출신 병원장

Q. 지난 7월 AHC 산하 포트 워싱턴 메디컬센터 원장으로 부임했다. 간호사 출신으로 병원장이 되는 게 미국에서는 흔한 경우인가.

“미국에서도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라고 한다. 간호사는 간호이사(CNO)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여자가 병원장까지 올라가기도 쉽지 않다. 더구나 동양인이 올라가는 건 더더욱 어렵다. 이민 1세로서는 거의 유일할 것 같다. 간호이사로 경력을 마치는 것보다 더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운도 따랐고.”

Q. 성공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신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리까지 올라가게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조건이 맞지 않은 사람도 신을 의지하면 여기까지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 같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경력을 쌓으면서 여러 병원에서 근무했는데, (이직할 때마다) 언제나 최선의 결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곳에서도 그때그때 필요한 자질들을 갖추게 하셨다는 게 눈에 보이더라.

한 번은 영리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19개월밖에 못 버텼다. 보통 사람들은 1년을 못 버티는 병원이라 19개월이면 오래 버틴 거다. 힘들었지만, 다른 병원에서 10년 이상 배워야 할 재무관리 지식을 압축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께 의지를 많이 했고 계속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를 했다.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Q. 질문을 바꿔 하겠다. 그렇다면 신으로부터 받은 탤런트(재능)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성격이 참 긍정적이다. 주어진 사물이나 문제 상황을 보면 가능성부터 보이고, 뭐든지 아주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일을 보면 겁내지 않는다. 그래서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런 성격이 살면서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Q. 엄마로서는 몇 점이라고 생각하는지.

“일을 너무 많이 해서(웃음). 자녀가 넷이고, 막내가 15살이다. 아이들한테 자주 물어본다. 엄마가 일을 많이 해서 서운하지 않으냐고. 아이들은 엄마가 이민 1세로 여기까지 와서 굉장히 자랑스럽다고 한다. 덕분에 자신들이 독립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고 말한다. 아이들과의 관계가 굉장히 좋다. 물론 전통적인 잣대로 엄마로서의 가치를 평가한다면 굉장히 점수가 낮을 거다(웃음).

남편이 좋은 파트너가 돼주고 있다. 막내가 태어났을 때 남편이 일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우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건 아빠가 하고, 나는 밖에서 진취적으로 일을 한다. 한국 남편들은 아내가 더 성공하는 것을 꺼리는 분들이 있는데, 우리 남편은 그런 게 없다. 그냥 도와주고 성공하면 됐지 그게 뭐 중요하냐, 이렇게 말한다.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하는 데 남편이 많이 도움을 줬다. 남편과 20년 넘게 파트너십으로 일하고 있다(웃음).”

지도자로 키워준 삼육교육

Q. 대학 시절 삼육대에서 배운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

“삼육대뿐만 아니라, 삼육교육이 다른 교육과 다른 점은 지도자로 클 수 있는 자질을 많이 가르친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도 아이들을 삼육 학교에 보내고 있다. 공립학교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앞에 나갈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삼육 학교는 기도하거나 예배를 인도하는 등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하는 연습을 많이 한다.

돌아보면, 삼육대에서 배운 것들이 인생에 참 많은 도움이 됐다. 간호학과 학회장을 하면서 리더십을 기를 수 있었다. 다른 좋은 간호대학 나오신 분들도 이민을 많이 왔지만, 그들보다 내가 더 좋은 조건을 갖춘 게 있다면, 바로 삼육대에서 배운 지도자로서의 자질이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장기적인 계획이다. AHC에서 1년에 몇십 명씩 삼육대를 졸업한 간호사와 물리치료사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 나가려 한다. 물론 이를 통해 AHC의 인력난을 해소할 수 있지만, 삼육교육을 받은 인재들로 채운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